사라진 고공 농성자 2명/
하정우의 독보적 연기가 돋보인 터널(김성훈 감독, 2016년)에 대한 리뷰는 모두 세월호에 집중되어 있다. 부실공사에 따른 하도 터널의 붕괴로 기아자동차 하도 영업소 직원 이정수(하정우 분)는 터널에 갇히고 만다. 액션 영화에서 총알은 항상 주인공을 빗나가듯이 영화는 주인공이 죽을까 살아남을까를 궁금증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35일 동안 갇힌 채로 사투를 벌이면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던 이정수에게서 해피엔딩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영화는 처음부터 스포일러를 제시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터널 바깥에서는 부실이 계속되고 있다. 관료들의 보여주기식 행보, 언론들의 특종 경쟁, 1명의 희생과 다수의 행복 중 어떤 쪽을 택할 것인가를 묻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식 질문이 영화를 끌고 가는 기본 틀이다.
재난, 박근혜를 연상시키는 여성 장관, 세월호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이었던 이주영을 닮은 배역 등이 나온다고 해서 터널을 세월호 영화라고 할 수 없다. 터널은 오히려 세월호를 철저히 비껴간다. ‘의미 이론'(Logo Theraphy)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깨진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했던 경험처럼 이정수는 매몰된 상태에서도 면도를 하고 다른 매몰자의 얼굴을 귀한 물로 닦아 준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라는 프랭클의 말처럼 이정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재난의 상황에서 긍정적 태도는 바람직하다. 마션(The Martian, 리들리 스콧 감독, 2015년)에서 맷 데이먼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세월호는 다르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라고는 바깥 사회에 대한 신뢰밖에 없었다. 세월호 밖의 상황도 터널 밖과 달랐다. 세월호의 경우 마치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행동했다. 반면 터널에서 포기의 시점은 1차 굴착이 잘못된 설계도로 인해 허사가 된 이후였다. 터널에 나오는 정부는 세월호 정부보다 훨씬 유능했다.
냉소는 힘이 없다
정치에 대한 냉소, 언론에 대한 냉소, 이익 앞에서 비굴해지는 시민들에 대한 냉소는 우리의 자화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냉소는 힘이 없다. 안전을 지키겠다는 정부의 발표를 개 짖는 소리로 덮어버린 장면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웃음으로 치환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 냉소를 부채질하는 데 앞장서는 기관은 보수 언론이다. 그들은 여도 야도 보수도 진보도 똑같다는 여론을 조장한다. 이런 논리는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냉소를 개혁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보수 언론이 목표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을 대변해 줄 ‘비교적 진보’ 정당을 냉소할 때 보수진영은 하나로 뭉친다(최근 사드, 우병우 등으로 보수 진영이 붕괴하고 있다는 착시현상에 주의해야 한다). 대기업의 횡포나 아파트 입주를 때맞추어 하고 싶어하는 소시민들(강남이 아니라 하도라는 가상의 도시는 중산층의 도시일 것이다)의 욕망은 모두 똑같다는 논리도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다. 인간이라면 모두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지배계층은 욕망을 조절하고, 서민들은 욕망에 지배되는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터널은 마지막 부분에서 구조 작업을 포기하게 만드는 주체를 정부가 아니라 소시민의 욕망으로 슬쩍 바꾸어 놓는다. 비겁한 연출이다.
김대경이라는 ‘허수아비’ 영웅
두 개의 집단이 경쟁적으로 갈등하다가 폭발에 이르게 되면 희생양을 선택해서 갈등을 잠재운다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으로 보면 터널은 희생양의 영화가 아니라 영웅 서사다. 이정수도 영웅이지만 구조반장 김대경(오달수 분)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찾아 보기 힘든 영웅이다. 비록 높지 않은 지위이지만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고위층의 부당한 지시에 맞서는 인물은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워도 영화에서는 흔한 캐릭터다. 김대경의 역할이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감독이 오달수에게 그 역할을 맡긴 의도는 옳았다. 만약 차인표가 그 역할을 맡았다면 영화는 신파로 흘러갔을 것이다. 매몰자를 구조하는 일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라는 점을 ‘가벼운’ 오달수는 잘 표현했다. 심각한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당위에 따라 행동하던 그는 구조 작업이 중단 된 후에도 희망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가 마침내 구조에 성공한다. 그리고 정치인들과 언론을 향해 거친 말을 쏟아낸다. 이 부분이 통쾌하다고? 그래서 뭐가 바뀌었는데?
세월호는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유병언을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지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월호의) 폭력은 은폐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희생양으로 만들어낸 거짓 봉합에 속지 않았다. 그 뒤로도 ‘경제’, ‘화합’의 용어로 덮으려 했지만 유가족과 시민들은 말려 들지 않았다. 이들의 끈질긴 싸움이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사드 배치 반대의 목소리로 은폐되지 않은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싸움과 만났다.
터널이 세월호 영화가 되려면 이런 부분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영웅 서사로 우회하면서 진짜 현실과 맞서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이 최우선인 사회에서 이런 영웅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월호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모순은 영웅 하나로 인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구조에 나섰던 민간 잠수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 과정에서 김관홍 잠수사가 극단의 선택을 했다. 영화는 이처럼 현실과 다르게 김대경이라는 영웅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서둘러 덮어 버렸다.
두 명의 고공 농성자는 어디로 갔을까?
무너진 터널 위에는 고압 송전탑이 지나가고 있다. 밀양 송전탑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그냥 맛보기였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조출연자들 명단에서 고공농성자 1, 고공농성자 2가 나온다. 그런데 영화에는 고공 농성의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얼핏 지나갔는지는 모르겠다). 밀양 송전탑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감독의 용기가 거기까지는 못 미쳤나 보다. 아니 잦은 코믹 코드를 집어 넣을 때부터 감독은 용기를 내려 놓았던 것 같다. 요즘 한국의 감독들은 코믹코드 없이는 스토리를 전개할 역량이 없다고 자인하는듯이 영화를 만들어 나간다. 터널에서의 잦은 코믹 코드는 영화의 그나마 가벼운 메시지를 희화화 시킨다.
기아자동차 하도 대리점 이정수, 기아자동차는 이 영화에 많은 투자를 했을 것이다. 터널이 완전히 무너졌는데도 이정수가 타고가던 기아의 차종 올뉴K5는 붕괴를 견뎌냈고 35일 동안 자동차의 밧테리는 방전되지 않았다. PPL이 심하다.
영화에서 편집된 엔딩 크레딧의 고공농성자가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쌍용 자동차가 아니라 기아 자동차가 먼저 검색된다. 아마도 가장 최근의 기사순으로 배열된 것 같다. 연합뉴스 8월 18일 보도다.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옥상 광고탑에서 1년간 고공농성을 벌여 광고탑 전광판 소유업체 측에 억대의 배상금을 물게 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재산을 집행관이 강제집행했다. 18일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등에 따르면 수원지법 소속 집행관은 이날 오전 양경수, 최정명 씨의 가전제품 등 유체동산을 경매에 부쳐 400여만 원을 전광판 소유업체에 전달했다. 집행관은 지난달 양 씨와 최 씨, 한규협(42) 씨 등 3명으로부터 유체동산을 압류, 이날 양 씨ㆍ최 씨 등 2명의 유체동산을 처분했다. 한 씨에 대한 강제집행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이날 강제집행은 전광판 소유업체가 “기아차 고공농성으로 전광판 운영에 손해를 봤다”며 양 씨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따른 것이다.
국가 폭력과 거대 기업의 횡포가 지속되는 사회에서 밀양송전탑과 고공농성은 맛보기가 아니라 당사자들에게는 생존 자체다. 세월호는 희생자들의 생존 기술과 영웅적인 행동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거대한 국가 권력이 일방적으로 행한 폭력이다. 터널이 세월호 영화라고? 그것은 희생양을 통해 폭력을 은폐하려는 시도를 막아 낸 유가족과 노란 리본을 단 시민들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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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배
우병우로 보수 진영이 붕괴하고 있다구요? 조선일보가 왜 우병우 까대기를 했는지 모르신다는 건가요? 대우조선과 조선일보의 유착 관계가 드러났음에도 조선일보를 편을 드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