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시민 운동에 대한 소회
같은 것
내 세대에서 우탄트는 매추 친숙한 이름이다. UN이 정말 세계 평화를 위한 조직이라고 믿었던 시절 무려 10년을 역임한 미얀마 출신의 우탄트 UN 사무총장은 굵직굵직한 세계 현안을 해결한 인물로 사회시간에 외워야 하는 이름이었다. 또 버마는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태국 말레이시아와 더불어 한국에게는 늘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랬던 미얀마가 아시아의 빈국으로 전락한 배경에는 군부의 잦은 정치 개입이 있다.
또 한번의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저항이 지속적으로 불타오르는 것과 맞물려 쿠데타 세력의 진압도 드세어 지고 있다. 시위현장에서의 촛불, 임을 위한 행진곡, 한국어로 도움을 호소하는 우리 말에 능숙한 일부 미얀마 시민들을 보고 있자면 짧게는 촛불 시위에서부터 멀리는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경험이 시차를 뛰어 넘어 동병상련으로 소환된다. 날이 갈수록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남에 따라 이 비극을 바라보는 세계인이 우려도 깊어 지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이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미숙한 행정력으로 인한 진통은 당연한 터, 그러나 어느 나라 군부든지 간에 그들은 이 과정을 ‘진통’이라 부르지 않고 ‘혼란’이라고 부름으로써 군대는 개입의 명분을 찾아왔고, 이러한 개입은 비극으로 끝난 경우가 압도적이었만 만사를 대결과 승리의 틀로 분석할 줄 밖에 모르는 “군바리’(속어를 써서 미안하다. 그러나 ‘바리’라는 접미사가 어떤 경우에 쓰였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속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들은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도 두려워 않는 미얀마 시민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내 기억속에는 로힝야 족에 대한 몇 해 전 학살이 계속 잔영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아웅산 수치의 침묵은 그를 미얀마 민주화의 영웅으로 기억하는 세계인의 평가를 뒤집어 버렸다 현재 시민들의 저항이 의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극이 하루 빨리 종식되고 군인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원위치된 그 자리에서 소수 민족까지도 시민의 연대에 포함시키는 운동이 열매를 맺을 때 미얀마의 민주화는 한 걸음 더 나갈 것이다.
다른 것
일본 헌병 출신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그의 총애 속에 성장한 신군부 정치 군인들이 정권을 계승한 한국의 쿠데타 세력과 미얀마의 군대는 완전히 다르다. 미얀마 군부는 독립운동의 주축세력들이 독립 후에 군대를 조직한 경우다. 우리 나라로 치자면 독립군이 대한민국 군대의 창설을 주도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이 구도에서조차 한국과 미얀마는 ‘일본’이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당시 버마는 영국을 축출하기 위해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일본의 도움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독립후에도 무려 160여 미얀마내 소수 민족과의 갈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군부는 버마족이 주도권을 잡은 정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특히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 군대의 패잔병들이 미얀마 국경 지대로 몰려 오면서 소수민족을 후원했고, 이 지역에서 약화된 세력을 회복하려고 미국과 영국도 소수 민족의 편을 들었다. 이런 흐름을 막아야 하는 미얀마 정부는 중국 편에 섰고 그 과정에서 중국군대와 미얀마 군부의 관계가 밀접해 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의 전방위적 개입을 비판하는 한국의 진보 세력 일부는 중국과 미얀마 군부의 관계를 감안해 미얀마 시민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있다. 게다기 앞서 이야기했듯이 로힝야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침묵했던 미얀마 시민들을 ‘친미’라는 점에서 고깝게 보는 시각도 있다. 홍콩 사태와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민들의 순수한 열정도 미중 두 강대국과의 친밀도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이 서글프다.
하지만 지금의 미얀마 사태는 훨씬 더 복잡하다. 친서방 세력으로 분류되던 아웅산 수치는 로힝야 족 사태 이후 서방사회의 비난이 이어지자 친중국으로 선회했다. 아웅산 수치와는 적대적이었지만 중국과는 가까웠던 미얀마 군부는 화들짝 놀라 이번에 쿠데타라는 명분없는 악수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시위는 홍콩과도 다르고 친서방이냐 친중국이냐의 구도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 참에 군부가 친서방으로 돌아서려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홍콩사태와 달리 비판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미국의 입장이 그것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
사태의 배경과 역사는 외면하고 단순히 저항과 진압의 구도만 보고 ‘휴머니즘’ 또는 ‘민주주의’로 접근하려는 방식은 너무 안이하다. 이 두 방식은 모두에게 비판받지 않고 고민이 최소화된 안전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급해진 미얀마 군부의 명분없는 쿠데타를 편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상황에서는 더 큰 파국으로의 전개를 막기 위해 전세계 시민세력들이 연대해서 미얀마 군부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미얀마 시민들의 자유를 향한 열정은 존중하지만 그 ‘자유’는 소수민족에게도 동일하게 소중하다는 인식도 함께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주’이후 미국에 대한 일방적 구애도 많이 변했고, 시민 사회 분야에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향한 인식이 많이 개선된 우리의 변화(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에도 주목해 주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군부의 자기 성찰이 시급하게 요구되는 때다. 권력지향적인 제 3세계의 군부와 그들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자랑스러운’ 경험도 벌써 70년이 흘렀다. 우리 나라는 거스를 수 없는 기득권이 되어버린 친일 주류들의 잔재를 없애느라 독립운동 세력들이 지금까지 존경을 받아 왔지만 만약 우리도 해방직후부터 임정과 광복군이 주류가 되어서 지금까지 개입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반일 독립 운동 세력들이 주축이 된 북한과 중국이 치열한 노선 투쟁을 겪었다는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미얀마 군부는 해묵은 ‘정당성’만으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된 시대의 요구앞에 굴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