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구미시가 28억을 들여 제작하기로 했던 박정희 뮤지컬이 취소됐다. 여론의 역풍에 따른 선택이었지만 구미시가 박정희 우상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내년이면 1917년 생인 박정희가 태어난 지 100년, 구미시는 이른바 ‘탄신 100주년’ 행사의 하나인 뮤지컬은 취소했지만 박정희 테마밥상 등 관광 상품은 계속 추진할 예정이다.
구미시에는 박정희의 생가에서 구미초등학교까지 약 6.4 km 구간에 박정희 등교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길에 세워져 있는 지게를 진 어린 박정희의 동상이 일본 에도시대의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을 그대로 베낀 것이어서 표절 논란을 넘어 박정희 정신에 담긴 친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저자인 신은미 박사, 그는 지난 24일 로스앤젤레스 일본 거리(리틀 도쿄)의 니노미야 긴지로의 사진을 직접 찍어 페이스 북에 올리면서 이렇게 썼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국의 거리에 세워진 한 동상 사진을 보곤 깜짝 놀랐다. ‘어찌 저런 일본인의 동상을 세우다니’라고 탄식하면서. 자세히 보니 일본의 니노미야 긴지로가 아니라 한국의 박정희 였다.
에도시대 때 지게를 지고 다니며 공부를 해서 성공했다는 일본의 니노미야 긴지로 동상을 그대로 복사한 듯한 박정희의 동상이다. 모방도 좋다만 왜 하필이면 니노미야 긴지로일까.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을 ‘표절’한 사람(또는 기관)은 그가 정한론자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는지. 아니면 그들은 ‘뼛속까지 친일’인지…” (신은미 박사 페이스 북)
이어 박노자 교수는 신은미 박사의 페이스북을 공유하면서 니모미야 긴지로를 숭배하는 한국의 친일 세력들을 질타했다. 박교수에 따르면 “명치 정신이 여전히 식민성을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 우파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것이다.
“二宮 金次郎 (니노미야 긴지로)라는 막말의 인물은, 명치시대 때에 일본 지배층에 딱 필요한 ‘상징’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신과 윗어른 존숭, 근검절약, 자강불식, 도서와 출세, 자조하면 천조도 따라온다…명치 시대, 권위주의적인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말하자면 ‘딱 맞는’ 인간상은 바로 니노미야이었습니다.
윗사람의 말을 잘 듣고, 열심히 일하면서 열심히 독서하고, 그렇게 해서 출세를 도모하고, 가미 (신)들을 잘 섬기고….”순량한 황민”의 원형이죠. 그래서 1904년부터 일본제국의 국정교과서인 수신교과서에 이 니노미야 청년 미담이 나옵니다. 조선이 합병 당하자 식민지 보통학교 수신교과서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실리게 됐죠. 바로 이 교과서들을 가지고 다까끼 마사오나 이병철 등을 위시한 현대 한국의 ‘엘리트’들이 그 근본적인 세계관을 형성했습니다. 나아가서 다까끼라는 ‘반근대적 근대주의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근대인의 모범타이프’도, 니노미야와 그렇게 다르지도 않았죠. 국가에 복종하면서 자본 축적 과정에서 열성을 보이고, 출세하려고 발버둥치는 순량한 국민….” (박노자 교수 페이스북)
1787년 가나가와현 오다하라시(神奈川県 小田原市) 농가에서 태어난 긴지로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지만 특유의 근면성으로 36세에 지방 관리가 되어 농가 수확을 올리고 절제, 보은, 양보의 중요성을 가르친 인물로 일본의 대부분 소학교(초등학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에 대한 신비화는 이른바 긴지로 괴담을 생산하기도 했다. 성실한 긴지로는 동상 안에 갇혀 있지 않고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밤에 운동장을 거닌다(또는 마당을 쓴다)는 따위의 괴담이 일본 소학교에는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박노자가 한국 우파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지적했듯이 이어령이 2009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에는 이러한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바쿠단 상요시(爆彈三勇士)’, 구군신(九軍神) 그리고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천황을 위해 죽자는 세상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우애 있게 자라면서 열심히 책을 읽는 니노미야 긴지로는 분명 일본 사람인데도 이웃 동네 할아버지쯤으로 보였다. 더구나 그는 짚신과 관계가 깊다. 밤마다 짚신을 삼고 아침 일찍 그것을 팔아 푼돈을 모은다. 그렇게 시작해 몰락한 집안을 살리고 물건을 아껴 쓰는 법과 농사짓는 법을 개량하여 나중에는 기근으로 죽어가는 마을 전체를 일으켜 세웠다. ‘사쿠라마치’를 필두로 수십, 수백의 농촌을 빈곤과 게으름과 기근에서 구해낸 ‘니노미야’는 총칼이 아니고서도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을 걸었다.
그의 농사법 개량과 수차(水車)와 제방을 쌓는 신기술, 그리고 고리대금을 하지 않고서도 돈을 당당하게 증식하는 그 모든 놀라운 절학들은 한 켤레 짚신, 한 권의 책에서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길가에서 다 해어진 짚신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짚신 공양(供養)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중앙일보, 2009년 6월 9일)
긴지로는 총칼이 아니라 근면과 성실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는게 이어령의 주장이다. 물론 긴지로는 무사 계급도 아니고 고위 관료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도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농업 개혁운동은 메이지 유신이 연착륙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에도 시대 말기 자본계급이 성장함에 따라 농민의 삶은 크게 피폐해졌다. 반면 사무라이를 비롯한 상위계급들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 시기에 농업을 개혁하고자 했던 긴지로의 운동은 ‘보은’ 등의 도덕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비판을 잠재울 수 있었다.
더 이상 농민을 수탈하지 못하게 된 사무라이 계급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새롭게 시작한 메이지 시대는 불만에 찬 사무라이를 달랠 필요가 있었다. 불만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게 하는 가장 좋은 이념은 정한론이 었다.
특히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탈아입구’를 일본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데는 ‘근면성’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탈아’ 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조선이나 중국을 미개한 나라로 봐야 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에도막부가 견지해왔던 조선 존중의 태도는 에도 후기 정한론으로 뒤바뀐다.
일본에서 보면 더 ‘위대한’ 인물이 많았는데 왜 긴지로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추앙할까? 그는 정한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중앙 무대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요시다 쇼인같은 강경파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니노미야 긴지로는 메이지 이후 조선으로 눈을 돌리던 일본의 야욕을 숨기기에 적격인 ‘카케무샤’ 였다.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 조차도 니노미야 간지로를 일본을 만든 5명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을 정도였으니 그는 일본의 야욕을 숨기기 위한 ‘상품’으로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마찬가지로 구미시의 박정희 지게 동상은 총칼로 정권을 잡은 메이지 유신 신봉자 박정희를 포장하기 위한 설정이다. 따라서 지게 동상은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이 나라 지배권력의 일본 숭배의 표징인 동시에 지배 계급의 폭력성을 은폐하기 위한 복면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