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지난 4월에 있었던 한국의 총선 결과를 두고 다양한 정세 분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민의의 승리’라는 분석에는 이견이 없는 듯 하다. 선거의 여왕이 하사한 각종 지원은 오히려 독이 되었고, 잘한 것도 없는 더불어 민주당은 제 1당이 되었지만 국민의 당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민심에 의해 다른 형태의 심판을 받았다. 민의의 승리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과연 ‘민의’가 있기는 했나? 정책은커녕 잘난 인물이라도 뽑자는 인물론 조차 실종된, 공천 잡음만 들리는 선거였다. 그런데도 평소보다 많은 착한 ‘민의’들이 투표장을 향했다. 찍을 당도 사람도 없는 마당에 바뀜에 대한 작은 소망으로 그들은 표를 던졌다. 또한 민의는 엔터테이너가 되어 선거 결과를 아주 흥미롭게 만들어 놓았다. 왕의 목을 베어보지 못한, 즉 ‘높은 양반들’앞에서 작아지는 습성으로부터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민초들은 겨우 투표지 한 장으로 그들을 데리고 노는 소심한 복수를 했다. 유세 때 찾아온 후보에게 ‘똑바로 하라’고 소리치던 민의들은 당선인 앞에서 다시 고개를 숙일 것이고, 언론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정치 혐오를 부추겨 21대 총선 때가 되면 ‘바꿔야 한다’ ‘잘못했습니다’ 등등의 묵은 관용구가 다시 등장할 것이다.
서로 속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민심은 대단한 선택을 한 것처럼 의기 양양하고, 당선인들은 잠시라도 민의 앞에 숙연한 척 한다. 그런데 바뀌는 것은 없다. 새누리당이 스스로 무덤을 판 테러방지법이나 국정교과서 등이 20대 국회에서 다시 논의되겠지만 싸우지 않겠다는 온순한 야당을 생각하면 이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새누리 바라기를 하는 더 온순한 야당이 중간에서 몽니라도 부리면 개혁은 물 건너 간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대북 정책에 이르게 되면 서로 북한을 비판 못해서 안달이다.
보수논객 전원책은 어느 토론 프로그램에서 모든 당의 차별성이 사라졌으니 모두 합쳐서 거대 여당이 되어 정권을 계속 창출해 내라고 비아냥 댄다. 슬프게도 그의 지적은 20대 총선 결과를 놓고 보자면 맞는다. 김종인의 저의도 그게 아니었나 싶다.
정말 민심이 살아 있었다면 노동당, 녹색당, 민중 연합당 등에 더 많은 표가 나왔어야 했다. 잘난 민의는 오직 될 놈 밀어주자 정도의 수준 박에 안 되었다. 게다가 심판 한답시고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정당을 38석이나 만들어 준 것은 민의가 아니라 한풀이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갈라파고스, 2016년)에서 저자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오늘의 정치에서는 ‘열광’과 ‘불신’이 슬로건이 되어 버렸다고 지적한다. 두 대립항은 20대 한국 총선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SNS를 통한 열광과 정치에 대한 불신은 신기하게도 개개인 안에서 잘 조화되었다. 정당성과 효율성, 혹은 칼 슈미트 버전으로 하자면 정당성과 합법성은 대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면서 깊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합법적이고 효율적이면 옳은 것인가? 저자도 묻는 이 질문은 현대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저자가 말하는 정당성이 슈미트가 말하는 정당성과는 다른 의미지만 대의 민주주의로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같다. 레이브라우크는 투표율과 정당 가입율이 떨어지고, 투표 성향이 종잡을 수 없는 현실에서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주장하기는 어려운 현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저자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주장한다. 숙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할 뿐 아니라 그들끼리 혹은 전문가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고 의견을 개진하는 민주주의”다.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를 병행하자는 말이다. 그러면 숙의 민주주의를 시행할 사람들은 어떻게 뽑는가? 저자는 놀랍게도 제비 뽑기를 제안한다.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국회의원과 제비뽑기로 선발되는 이들이 양 날개가 되어 새로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로서는 아직 요원한 이야기다. 물론 유럽도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슈미트는 <합법성과 정당성>(도서출판 길, 2015년)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주권자의 결단을 강조한다. “이 결정은 단순히 법원의 판결도 아니고 법률을 제정하는 의회 다수파의 결정도 아니며 바로 법질서의 성격 자체에 대한 결정”이다. 카를 슈미트의 이런 주권적 정당성이 히틀러라는 괴물을 낳았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정답은 아니다.
결국 대의 민주주의로는 안 된다는 말인데 그러면 한국적 대안은 없는가? 합리적 자유주의자(더불어 민주당) 들이 대의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신봉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합법성, 합리성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민의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은 민의를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라 합리성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합리를 운운하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합리적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의’의 승리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초원복집 사건에서 저들의 승리는 이미 예측되어 있었고, 댓글녀 셀프 감금 사건에서 문재인의 표는 떨어져 나갔다. 두 사건 모두 호들갑을 떨지 말아야 했다. 비합리적 민심은 불안감을 느껴 표를 모았다. 하지만 ‘공정한 선거’ 밖에 내세울 것이 없던 이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오히려 표를 잃었다. 야권에서 경찰에 신고 정도 하고 물러 선 후 김용판의 말도 안 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면 선거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부정 개표가 없었다는 전제하에).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정몽준의 지지 철회로 노무현의 표는 모였고, 문재인이 호남에서 지은 슬픈 표정으로 호남 이외 지역의 표는 결집되었으니 모두 비겼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대의 민주주의에 믿을만한 민의는 없다는 뜻이다.
제도를 믿지 말고 정치를 하라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가 아니었다는 합리적 비판은 사실이다. 왼쪽 깜박이를 넣고 오른 쪽으로 주행했다는 세간의 농이 정확하다. 강정마을, 한미 FTA, 신자유주의 정착 등이 모두 그의 재임시절 일어난 일이다. 그때는 가만있던 민의가 다음 정권에서 폭발하니 보수세력의 억울함도 이해는 간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다. 거기에는 그의 소탈함이나 연설이 가진 선동과 매력이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매력이 자신의 생각과 다름에도 진보나 자유주의자들이 꾸준한 애정을 보내는 이유다.
보수세력이 억울하듯이 김규항 박노자 홍세화 같은 ‘진짜’ 진보 논객들도 노무현이 진보의 상징이 되어 있는 현실을 몹시 불편하게 여긴다. 한때 노무현에게 칼을 갈던 진중권은 요즘 완전히 ‘노빠’가 되어 있다. 어쩌겠는가? 약점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부분도 정치의 일부인 것을.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인 김태형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다음 대선은 ‘ 돈으로 못 이긴다’고 전망했다. 경제가 화두가 아니라 시대정신이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북인식, 양극화, 노무현이 기치를 내걸었던 ‘사람사는 세상’의 정치를 해나가면서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 와야 한다. 새 판(프레임)을 짜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가한 이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가서 구걸하듯이 그들의 프레임에서 놀아나고 있다. 더 한가한 이들은 집권 후 국정원 개혁이니 검찰 개혁이니 하고 있다. 새로운 프레임에서 그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정치’해야지 노무현처럼 자율성을 주는 일은 정당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제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도를 표방하고 싸움을 피해가려고 한다.
권력을 쥐는 데에는 현재로는 선거제도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내년에 있을 대선에서 ‘선거 제도’의 덕이라도 보려면 그들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선전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정당성을 포기하고 저들의 정당성에 한발 얹으려는 비굴함으로는 좋은 세상도 못 만들고 승리도 기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