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와 독립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한 손정도 목사는 그의 이력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손 목사는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앞장서 온 민족의 지도자이며 동시에 현장 목회와 해외선교를 조화시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에 헌신한 순수한 기독교 목회자이기도했다. 특히 정동감리교회 담임시절에는 이화여고를 다니면 교회를 출석했던 유관순 열사에게 애국정신과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설교와 교육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어 훗날 3.1운동의 주역이 되게 했고, 동대문교회 담임시절에는 김상옥 열사에게 애국정신과 항일의식을 심어주어 그로 하여금 무장투쟁의 투사가되게 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 감리교단의 초기 만주지역으로 파송된 선교사로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조선 이민자들과 동포들과 가난한 농민들을 위한 목회에 중점을 두었으며 중국뿐 아니라 선교사로 파송되기 직전과 직후에는 우리나라의 이북과 이남지역을 골고루 다니며 목회활동을 했다. 손 목사는 이처럼 동북아와 한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독립운동과 목회활동을 일치시키던 중 일경에 의해 일본 가츠라총리 암살사건과 조선인무관학교 무기 공급혐의로 전남 진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지에서 조차 동료들과 진도 주민들에게 민족계몽과 복음을 전하여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수 십리 밖에 있던 많은 주민들이 손 목사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몰려들 정도였고 일본 형사들도 자발적으로 찾아와 그의 가르침에 감동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으면 유배지였던 진도에 살던 9살 소년 정경옥이 그의 영향을 받아 훗날 장성하여 미국유학을 마치고 독립운동가로서 또는 한국 감리교 신학계의 거목이 되기까지했겠는가?
또한 손 목사는 현순, 안창호, 김구, 이승만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설립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의정원 의장(국회의장), 국무위원(교통부장관), 대한적십자회장, 노병회, 의용단, 대한교육회, 인성학교교장등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를 설립하거나 가입하며 맹활약을 하였고 길림에 돌아와서는 안창호 선생과 함께 농민운동사업과 항일운동을 열정적으로 병행하였다. 그러다가 투옥 중에 받은 심한 고문독과 지병으로 1931년 2월 29일에 이역만리 중국길림의 한 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생애를 마감하며 순국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으나 그의 유해는 중국문화 혁명으로 인한 묘역 파괴로 인해 아직도 찾을 수 가 없어 길림성 밖 밀산 묘지 어디엔가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특별히 손정도 목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걸레철학’을 주창한 인물로서 자신이 먼저 목회현장과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몸소 걸레가 되고자 실천했다. “비단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걸레는 하루도 없으면 살 수 없듯이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한 걸레가 되겠다”는 선언했던 그는 걸레가 자기를 더럽히면서 남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다가 쓰임을 받은 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던져지고 관심 밖의 존재가 되는 것처럼 손 목사는 항상 궂은 일은 도맡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높여주었으며 자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내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러기 때문에 이승만, 김구, 안창호등의 지명도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손 목사는 아직도 일반 대중들에게 낯설은 이름이 된 것이다. 이처럼 ‘민족의 걸레’가 되고자 했던 그의 생활원리는 삶과 목회의 주된 철학이며 신앙고백이었기에 그는 어느 누구와도 불화한 적이 없었으며 가는 곳마다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하며 모범을 보였다.
김일성과의 인연
특히 손 목사는 만주 길림교회에서 목회 할 때 부친(김형직)을 잃고 자신을 찾아온 청소년 김성주(김일성 주석)를 양자로 삼아 육문중학교에 입학시켜주며 약 4년간을 물심양면으로 보살피며 항일정신과 민족정신을 심어주었다. 특히 손 목사가 목회하는 길림조선인교회에 같이 출석했던 손 목사의 장남인 손원일과 김성주는 같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의 직책도 맡았는데 한국의 초대 해군참모총장(정전협정당시는 국방부장관 재직)으로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중앙철 탈환등의 전적을 나타낸 손원일 장군과 북조선 인민군총사령관이었던 김일성 장군은 훗날 6.25 전쟁 당시 각각 남과 북의 전쟁을 책임지고 이끄는 대결구도를 벌여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훗날 김일성 주석은 그의 자서전에서 손 목사를 “생명의 은인, 친아버지, 국부(國父)”라는 최대의 존칭을 사용하며 존경해 왔고 그의 자녀와 후손들을 찾아 일일이 후대하며 은혜를 갚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손 목사는 한국 공군창설의 주역이며 ‘공군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는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에게도 큰 비전과 영향을 끼쳤다. 또한 장남 손원일에게 ‘우리나라가 하루 빨리 해양강국이 되어야 나라가 발전 할 수 있다’며 중국 중앙대학 항해과에 입학을 시켜 훗날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는 호칭과 함께 해군창설의 주역이 되게 했다. 이처럼 손 목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계 뿐 아니라 국가발전과 국방력에 그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선구자적인 예지력과 애국정신을 지닌 인물이었다.
요즘처럼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교회가 대립의 커다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손정도 목사가 그립다. 남북이 모두 존경하는 손정도 목사의 사상과 삶은 남과 북과 해외동포들에게 민족화합과 남북사회 통합의 새로운 이슈와 비전을 제시하며 분단극복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보수적이고 반공적인 한국 교회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그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다. 서북 청년단의 배후가 되어 같은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한경직 목사가 한국 교회의 사표처럼 기억되는 현실은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
최재영 목사(손정도 목사 기념 학술원 원장)
One Comment
정명기
글 잘읽었습니다
그렇지않아도 궁금했는데 손정도 목사님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