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6년 버지니아에서 신대륙에서의 첫 번째 반란이 일어난다. 총독 윌리엄 버클리( William Berkeley) 의 통치 방식에 문제를 느낀 농장주 베이컨(Nathaniel Bacon)이 일으켰기에 베이컨의 난으로 불리는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미국의 흑백 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약 400명 정도의 ‘반란군’은 백인 자유인,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된 계약직 노동자, 흑인 노예 등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에 종사하는 백인 하인들도 있었고 흑인들도 모두 노예가 아니고 계약직 흑인들도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신대륙에 처음 도착한 흑인은 노예가 아니라 계약을 맺고 온 사람들이었다. 베이컨의 난이 진압되면서 마지막으로 투항한 100명은 흑인이 80명이었고 영국인 하인 20명이었다. 베이컨이 어떤 리더십을 갖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신분에 관계없이 반란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흑백, 혹은 신분이 서로를 갈라 놓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다른 농장주들에게는 흑인과 백인의 연대가 위협적이었다. 1691년 백인이 흑인과 결혼하면 버지니아에서 추방되는 법이 제정되었다. 결혼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17세기 미국의 노동 계층은 흑백과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서로 술 주정도 받아 주는 그런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농장주들 입장에서는 백인과 흑인들이 연대하는 일을 막아야 했다. 이 단계에서 흑인은 열등하다는 인식을 백인 노동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했다. 같은 죄를 지어도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관대한 반면 ‘열등한’ 흑인들에게는 ‘사지절단형’과 같은 참형이 가해지기도 했다.
초기 버지니아 이민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에드먼드 모건(Edmund Morgan)은 미국의 흑백차별이 피부색의 이질감에서 온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부유한 자본가가 가난한 노동자와의 계급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고안한 통치구도라고 설명한다. 1705년 버지니아에서 제정된 법에 따르면 계약 기간이 끝난 백인 들에게는 곡식과 총기, 50에이커의 토지를 주어 흑인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차별을 성서적으로 정당화시켜 주었다. 반면 퀘이커 교도들은 1688년에 “사람을 훔치거나 납치하는 이들, 사람을 사고파는 이들, 이들이야말로 노예로 삼아 마땅한 이들”이라며 노예 제도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 헌법을 기초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말하는 ‘우리 국민(We the people)’에도 흑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개돼지 취급을 받던 흑인들은 건국으로 인해 그 ‘천한’ 신분이 법적으로 인증된 셈이다.
혹자는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이 활발하던 당시보다 지금이 더 흑백 갈등이 심하다고들 이야기한다. 경제적 위기에서 오는 분노는 가진 자들을 향해야 하는데 오히려 흑인들과 같은 약자를 향하고 있다.
이번 달 들어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두 명이 무저항 상태에서 ‘총살’을 당했고 이에 저항하는 퇴역 군인이 백인 경찰만 겨눠 사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냥 피부색만 다른 것인데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돈’이 곧 신이 되어버린 퇴로없는 사회 현상의 결과다.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남아 근로자를 향한 무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은 겉으로는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되어 있는 듯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기 밥그릇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증오의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맘몬과 패권을 향해 치닫는 세계를 멈추어 서게 하는 일이야 말로 기독인들의 몫일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교인 중 개돼지가 아닌 1%가 얼마나 많은가를 자랑하고 ‘개 돼지들’은 1%의 언저리에라도 머물려고 방향없이 달려가는 성공이라는 열차에 올라타려고 한다. 미국이나 한국 모두 슬프고 위험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One Comment
헤이즐
디아스포라…. 흠… 대한민국은 좋은 국어를 가지고 있는데 굳이 이런 단어를 이런곳에 쓰는지 알수가 없네… B 급이여서 그런가… 굳이 창의 제목으로 사용하려면 한국내에 있는 탈북민, 제 3국들의 노동자, 한국내 이민사 등의 기사내용이 이창의 이름과 더 어울릴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