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무당만큼만이라도 해라 /
몇 해전 SBS에서 “최후의 툰드라”라는 다큐멘터리(4부작)를 방영한 적이 있다. 섭씨 영하 6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순록떼를 뒤따르며 사는 툰드라 원주민들은 순록을 잡아 고기는 주식으로 가죽은 옷 또는 주거용 천막에 사용한다.
순록떼를 따라 다니는 부족과 달리 산 속에 정착한 부족들은 언제 또 순록을 보게 된다는 기약이 없다. 추운 땅이기에 보관에 문제가 없음에도 그들은 욕심을 내지 않고 일용할 양식 만큼만 잡는다. 이유는 사냥을 나서기 전 샤먼(무당)이 욕심을 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욕심을 내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 무당의 가르침이란다.
순록의 내장을 모두 꺼낸 뒤 온 식구가 순록 옆에 오순도순 모여서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법한 아이들도 따뜻한 피를 마시며 ‘문명’의 아이들이 우유를 흘리듯이 입가에 묻은 순록피를 닦아내며 천진한 웃음을 짓는다. 동토의 땅에서 얻기 힘든 비타민 C와 철분을 공급하는 가장 좋은 음식이 순록의 피라는 나레이터의 설명이 없다면 마치 흡혈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문명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충분히 야만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무당의 가르침을 따라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그들을 누가 야만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툰드라 지역의 무당들은 자본주의를 신봉하며 권력에 기생하려는 목사들보다 훨씬 더 종교인스럽다.
박근혜씨의 측근 최순실씨가 대한민국을 쥐락펴락 했다는 사실에 ‘무당이 지배하는 나라’라며 모두가 낯뜨거워 하고 있다. 그러나 무당(샤먼)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중재자로 자연이 원하는 바를 인간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무당의 무(巫)도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시베리아 지역의 샤먼들은 동토의 땅에 묻혀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가 깨어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샤먼으로 인정받는다. 자기의 모든 것을 죽음의 단계까지 버린 다음에야 얻어지는 영성이다. 우리의 유명한 무가 바리공주 무가에서도 자기 희생을 통해 용서와 화해가 선포된다. 그런 점에서 최순실을 무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짜 무당을 욕보이는 언사다.
구약성서 신명기 18:10-11에는 새로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본받지 말아야 할 역겨운 일들을 거론한다. 히브리 공동체가 아닌 주변의 부족에 들어와 있는 일종의 종교 사기꾼들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순진한 백성들에 기생하는 직종이 많기도 참 많았던 것 같다.
1)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사람 2) 점쟁이 3) 복술가 4) 요술객 5) 무당 6) 주문을 외우는 사람 7)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사람 8) 박수 9) 혼백에게 물어 보는 사람.
여기서 최순실은 어디쯤 속할까? 아마도 두 번 째인 점쟁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면 박근혜는? 아홉 번째인 ‘혼백에게 물어 보는 사람’ 으로 보인다. 최순실을 통해 박정희와 최태민의 혼백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에게 목사라는 호칭이 붙은 것에 대해 많은 목사들이 불편해 한다. 그가 정체 불명의 교단 출신이라느니 승려 생활을 했느니 하면서 최목사와 자신을 구별하려 애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구분이 잘되지 않는다. 최목사 앞에 줄을 서서 충성을 다짐하는 자료 영상이 그것을 증명한다. 게다가 아직도 박정희 찬양, 박근혜 찬양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광야의 여섯 번째 역겨운 직종과 매우 흡사하다. 뭐 그리 구별하려 애쓰는가?
대부분의 목사들은 이 부끄러운 시국에서 박씨 모녀라는 최고 존엄은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애먼 무당 탓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물든 목사들은 최소한 툰드라의 무당 만큼이라도 선포해 보고 나서 무당 운운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