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외로워 하지마! 네 슬픔이 터져 빛이 될꺼야’(체게바라 시 ‘리얼리스트’ 전문)
체게바라 그는 어쩌면 ‘예수’ 이후로 세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먼 남미의 한 혁명가를, 그것도 자신의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혁명에 참여하다 총탄으로 쓰러진 그를, 사후에 손가락 하나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수단으로 미국에 보내지기까지 한 그를 사람들은 사랑하고 존경한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그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했다.
오늘 ‘완전한 인간’으로 칭송받는 그가 살아있었다면 여든여덟 번째 생일상을 받는 날이다(1928년 6월 14일 나서 1967년 10월 9일 죽다). 88세의 체게바라는 여전히 시가를 물고서, 쿠바나 볼리비아 험준한 산악 어디쯤에서 동지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을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인생관), ’우리는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절망 중에서) ‘그것은 때로 당신들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 <체 게바라 시집>(이산하 편역) 등 그가 남긴 말과 글들은 시집과 평전, 전집에 담겨져 혁명의 바이블이 되어 전 세계인의 가슴에 새겨지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편하게 살 수 있는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과 그의 진정성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리라.
본명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이자 혁명이론가. 남미의 예수로 불리는 그는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건축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중산층 가정에서 운동, 여행,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자라났고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용병대 쿠데타로 인한 과테말라 정부의 붕괴로 제국주의와 남미의 사회적 불평등에 강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혁명만이 라틴아메리카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과테말라에서 혁명을 시작한다. 1960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의 환대를 받았다.
1954년 멕시코에서 망명 중이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만나고 혁명동지로서 쿠바원정대가 된다. 게릴라 전쟁을 도와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를 축출하는데 그가 이끌었던 산타클라라 기지의 전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카스트로가 쿠바의 정권을 잡은 뒤, 체 게바라는 “쿠바의 두뇌”라고 불리우며 산업부장관, 국립은행 총재들을 역임한다. 하지만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는 혁명군으로서 자신의 열정을 멈추지 않았고 다시 무기를 들고 혁명의 전선에 선다. 볼리비아의 반군 지도자로 1966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붙잡혀 1967년 10월 발레그란데(Vallegrande) 근처에서 총살됨으로써 열정적으로 살아온 그의 삶은 막을 내린다. 총살 후 그의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는다.
그의 시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돼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됐다.
권미강 기자(민플러스) / 민플러스(http://www.minplus.or.kr) 본보 제휴
<체게바라 참고 기사>
http://www.marxist.com/forty-years-death-che-guevara091007.htm
http://www.marxist.com/forty-years-death-che-guevara-part-two10100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