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품 불매 정국과 맞물려 흥행에 성공할 것처럼 보였던 ‘나랏말씀이’가 역사 왜곡 프레임에 걸렸다. 시국을 타려했던 영화가 시국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감독과 제작사는 서둘러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이미 진화시기를 놓쳤다.
영화는 영화로 보아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충고도 있지만 상업영화가 아니라 다큐라고 불러야 좋을 구성이기 때문에 이 충고도 맞지 않다.
영화가 역사를 비틀 수 있다고 항변하지만 거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대표적인 영화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거친 녀석들-Inglorious Basterds’(2009)다. 히틀러가 1944년 파리에서 죽지 않은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역사다. 그러나 감독은 히틀러와 괴벨스 등을 1944년 파리 극장에서 ‘폭사’시켰다.
또한 영화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을 무시할 수도 있다. 이 또한 ‘거친 녀석들’에 잘 나온다. 영국군 장교가 상급자에게 작전을 보고할 때 방 한구석에 윈스턴 처칠이 담배를 피고 있다. 그가 처칠이라는 사실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나 확인된다. 대사도 없고 화면 한 구석에 찌그러져서 장교의 경례도 받지 못한다. 2차 대전 영웅을 이렇게 다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확실하다. 2차대전의 승리는 아이젠 하워, 처질 같은 전쟁 영웅의 공헌 때문이 아니고 거친 녀석들인 ‘아래 것’들의 희생때문이라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다.
영화에서는 같은 땅 프랑스에서 일어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던 즈음에 파리에서 히틀러를 죽임으로써 전쟁을 끝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타임슬립 영화의 흔한 장면들처럼 역사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는 무뢰배를 뜻하는 Bastards도 의도적으로 철자를 틀리게 함(Basterds)으로써 철자도 제대로 모르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나랏말씀이’에서는 역사를 비틀고 세종을 무능한 왕으로 그린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한글보다 신미와 산스크리트어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개취급받는 승려였으니 한글 창제에 민중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도 실패했다. 백성을 가르친다는 유교적 가치관을 담은 용어인 ‘훈민정음’ 대신 민중의 언어인 ‘언문’이라는 한글의 명칭도 세종과 신미의 생각이었다는 장면에서는 더욱 아연해 진다. 한글의 민중성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의도였겠지만 백성을 무지하게 취급하는 세종과 이미 권력이 되어 버린 신미의 의중만 보여주는 장면이 되고 말았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다르다’는 훈민정음 서문은 말의 기준을 중국말에 두고 있다는 당시 집권세력의 한계였는데 영화에서는 그 글자 수 108자만 강조되고 있다.
조철현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가 시작할 때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자막을 넣었지만 나로서는 넣고 싶지 않은 자막”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의도를 확실히 했다. 그는 불교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신미가 한글창제에 깊게 관여했다는 주장의 근거인 ‘원강선종석보’가 위서라는 사실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법보신문도 조철현 감독을 응원하고 나섰다.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외국학계에서도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중 주류는 국내 학계와는 달리 범어나 티베트어 기원설에 상당히 무게를 싣고 있는 추세다. ‘외국인의 한글 연구’(태학사)에 따르면 일본의 금택장삼랑(金澤庄三朗, 1900, 1911), 러시아권의 이스트린(1965), 라시예프(1966), 콘체비치(1973) 등을 비롯해 서구 언어권의 레뮈자(1820), 쿠랑(1894, 1895), 헐버트(1892, 1896), 호프(1957), 에카르트(1960), 필(1983) 등 범어나 티베트어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법보신문, 2019년 7월 31일)
불교영화를 만들면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21세기에 불교가 여전히 천대받는 민중의 종교라면 이런 영화는 의미를 가지지만 지금 한국 불교는 거대한 부와 부패의 온상인데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한글을 폄하하는데 사용된 외국의 사례들을 인용한 이유도 불쾌하다. 위에 나오는 일본 학자의 주장은 국권이 상실된 시기에 쓰여졌다. 법보신문의 이재형 기자는 ‘그 중 주류는 국내 학계와는 달리’라고 씀으로써 한글 연구의 신뢰성을 외국 학자들의 주장으로부터 찾고있다.
한글을 세종대왕이 아니라 승려 신미가 다 만들고 집현전 학사들은 숟가락만 얹었단다.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역사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리려면 다큐가 좋다. 상업영화로서 긴장감을 더하려면 세종과 신미간의 갈등구조가 더 부각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양반들에게는 배척당하는 불교를 민중지향적으로 만들기 위해 고뇌하는 불교계, 마침 산스크리트와 팔만대장경안에 소리 글자의 신비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체 문자를 만드려는 노력들, 글자가 없어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을 더 강조해야 했다. 이런 시도들이 문자를 창제하려는 세종의 귀에 들어가고 신미와의 만남을 통해 계기를 찾았다는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지금과 같은 혹평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국력이 강하던 세종 시절에 궁궐에 들어와 팔만대장경을 내 놓으라는 일본 승려들을 못 쫓아내어 승려를 궁으로 불러 해결했다는 이 설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미는 최순실의 전생?
산스크리트어로 능엄경을 독송함으로써 일본 승려들을 단번에 제압한 신미는 세종대왕으로부터 새 문자의 창제를 부탁받는다. 영화적 갈등이 필요한 감독은 ‘버릇없는‘ 승려가 세종대왕을 무시하는 것으로 갈등구조를 만든다. 이것은 갈등이 아니라 세종이 제압된 거다. 실제로 세종에서 세조로 이어지는 정권이 불교에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도 이런 설정은 불쾌하다. 그래서 기존의 영화와 달리 수양대군(세조) 역할도 선한게 생긴 배우에게 맡겼다.
처칠이 2차 대전의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타란티노 감독은 장교의 입을 통해 처칠을 모욕하지 않는다. 카메라 앵글에서 비켜나있는 일종의 ‘미장센’(영화 연출상 배경 디자인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영화 기법)으로 처칠을 배치한다. 그런데 ‘나랏말씀이’에서 세종은 우유부단해서 왕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임금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나랏말씀이는 대표적인 ‘국뽕’영화인 ‘자전차왕 엄복동’만도 못한, 한글 창제에 있어서 신미의 역할이라는 다큐멘터리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