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흑인 소년의 성정체성을 소재로 삼은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수상했다. 또한 문라이트의 마하셜라 알리는 남우 조연상을 받음으로서 무슬림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자가 되었다. 많은 배우들이 파란 리본을 달고 나온 것도 눈에 띄었는데 이 리본은 도널드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들에 맞서 싸우고 있는 미국 시민 자유 연맹(ACLU)이 벌이고 있는 운동의 표식이다. 다양성을 중히 여기는 아카데미가 트럼프를 겨냥한 제스쳐를 했다.
라라랜드는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을 다룬 영화다. 뮤지컬형식을 도입한 영화는 판타지 영화 같은 촬영기법, 아름다운 노래들이 시선과 귀를 끌기에 충분했다.이날 ‘라라랜드’는 6개의 상을 수상했다. 전작 위플레쉬에 이어 두번째 작품에서도 성공을 거둔 32살짜리 천재 감독 다미엔 샤젤이 감독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여우 주연상(엠마 스톤), 촬영, 미술, 주제가, 음악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지난 1월 7일 골든글로브에서 7개 상을 수상한 것에는 하나 못 미치지만 시상자 워렌 비티가 라라랜드를 작품상으로 잘못 호명하는 바람에(실제로는 ‘문라이트’가 작품상이었고 시상자의 실수가 아니라 발표내용을 적은 메모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한다) 아카데미상 최대의 방송사고라는 ‘번외상’을 받았다. 라라랜드 제작자는 수상 수감을 말하다가 그만두어야 하는 수모 아닌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배우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미아’는 꿈과 사랑을 다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재즈에 인생을 건 재즈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는 사랑을 나누면서도 열정을 추구하고 서로를 격려한다. 카페 종업원의 짜증나는 미아의 삶에 세바스찬의 음악은 하나의 복음이었다.
왜 남자 주인공의 음악장르가 재즈일까? 재즈의 예측할 수 없는 변주는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은유한다. 두 사람이 꿈도 이루고 사랑도 이룬다면 영화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 사랑은 깨어지고(사랑이 깨어졌다기 보다는 꿈을 이루는 과정이 서로 달랐을 뿐이기에 만남이 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별한다. 남자는 여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꿈을 잠시 유보하지만 여자가 바라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를 구원한 재즈에 기꺼이 열성신도가 될 수 있었는데 남자는 그 점을 놓쳤다.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우한다. 이 장면도 아름답다. 말은 안 해도 서로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을 격려하는 눈빛이 교환된다. 통속 드라마처럼 세바스찬은 미아에게 “지금 사는 남편이랑 행복해?” 따위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옛 사랑과 꿈은 아름다웠고 지금 그것을 추억하는 것 조차 아름답다.
그런데, 과연 현실은?
노량진 고시촌의 사랑은 그리 생명이 길지 않단다. 꿈이 사치재가 되어 버렸다. 공무원 고시에 젊음을 걸어야 하는 ‘생존’이 우선인 현실에서 꿈은 유보를 넘어 폐기된다. 미국도 다르지 않을 터, 중산층은 무너지고 한국처럼 미국의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못사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라라랜드의 색채가 화려한 것도 현실과 꿈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미술상은 분명히 받고도 남을만했다.
사람은 모두 야행성 동물
스릴러물에 인색한 아카데미이기에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 톰 포드 감독, 2016) 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지만 좋은 영화다(베니스 영화제에서는 2016년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녹터널 애니멀스 역시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 깨어진 사랑의 재회가 소재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선 오스틴 라이트의 소설 ‘토니와 수잔'(우리 말로도 번역 출판되어 있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고급 갤러리의 주인인 수잔(에이미 아담스)에게 어느 날 전남편으로부터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원고가 배달된다. 소설가였던 전 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는 예전 함께 하던 시절 자기가 쓴 소설의 첫 독자였던 수잔에게 19년만에 원고를 보낸 것이다. 영화 속 소설의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 ‘수잔에게 바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을 부족한 것 없는 현실이지만 뭔가 따분한 수잔이 읽어나가면서 영화는 현실의 수잔이 에드워드와의 옛 사랑을 기억하는 장면과 소설을 영상화한 장면으로 교차 편집된다. 영화 속 소설의 주인공 토니(수잔의 옛 연인 에드워드와 영화 속 소설 장면의 주인공 토니는 제이크 질렌할이 모두 연기했다. 반면 영화 속 소설의 토니 아내와 영화 속 현실 수잔은 다른 배우다). 이는 에드워드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반면 수잔은 잊혀진 존재다. 실제로는 그 상처에서 못 벗어나면서 말이다.
영화 속 소설의 주인공 토니는 아내와 딸과 함께 가족여행을 가다가 텍사스 한적한 고속도로 변에서 아내와 딸은 강간 살해 당하고 본인만 살아남는다. 토니는 폐암에 걸려 죽어가는 지역 형사 바비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딸을 그렇게 만든 이들에게 복수한다.
현실에서 수잔은 에드워드와 헤어지면서 꿈보다는 현실을 택했었다. 별로 재능도 없어 보이는 에드워드에게 첫 소설을 읽고 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고 핀잔을 주었었다. 수잔이 이별을 고민할 때 에드워드를 향한 수잔 어머니의 미움은 두 사람을 갈라 놓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이제 에드워드는 소설 속 토니를 통해 수잔에게 복수한다. 19년만에 글로 복수하는 지질한 남자, 라라랜드에서처럼 꿈을 변질시킨 남자에 대한 미아의 실망과는 다른, 즉 법학공부를 멀쩡히 하다가 헛된 꿈을 꾼다며 남자를 떠난 수잔은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더 자주 마주친다. 녹터널 애니멀스, 즉 야행성 동물’들’처럼 우리 모두는 어둠의 가치에 익숙하다.
영화 속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19년 전 에드워드와 수잔, 그리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을 중첩해서 담아 놓았다. 에드워드의 기억 속에서 수잔은 이미 죽었으며 강간범 레이는 수잔의 어머니다. 어머니에 의해 수잔은 19년 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 에드워드(토니)의 주변에는 그날 이후 사회의 냉혹함을 가르쳐 주는 형사 바비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마지막 에드워드는 수잔에게 만남을 제안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수잔은 오랫동안 기다리지만 약속을 제안한 토니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 지질한 복수여! 아니 어쩌면 에드워드는 영화 속 소설에서 토니가 레이를 죽인 후 자살한 것처럼 자신의 자살로 자학적 복수를 완성시켰는지도 모른다.
에드워드를 기다리는 수잔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이 선택했던 안락한 결혼이 주는 무료함 때문에 후회하고 있었을까? 딸의 행복을 물질과 지위에서 찾고자 했던 속물 엄마의 탓을 하고 있었을까?
라라댄드에서는 밤도 환하지만 녹터널 애니멀스에서는 낮도 어둡다. 라라랜드는 아름답지만 녹터널 애니멀스는 슬프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수잔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과도한 비만의 여성들이 나신으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육중한 몸매는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다. 자본주의는 이미 중병을 앓고 있지만 갤러리의 큐레이터들은 그것을 ‘돈 되는 작품’으로 연출한다. 모두가 신자유주의를 한마디쯤은 비판하지만 그것을 즐기고 있는 현실, 수잔은 19년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복선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반면 19년전 미래의 작가를 꿈꾸던 에드워드는 과거에 갇혀 있다.
라라랜드같이 아름다운 세상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어둠과 욕망과 배신과 지질한 복수와 서글픈 추억 속에서 겨우겨우 생존해 가는 게 현실이다. 이런 사회를 구원할 사람은 폐암에 걸려 있으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즉 지질한 세상과 결별을 재촉하는 녹터널 애니멀스의 바비같은 존재다.
꿈과 사랑과 재회를 두 영화가 이렇게 다르게 그릴 수 있구나? 과연 라라랜드처럼 아름다운 색채로 가득한 세상이 오기는 할까? 실제 현실에서 꿈과 사랑과 정의를 찾는 사람들은 바비형사처럼 용도 폐기된 사람으로 취급받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녹터널 애니멀스는 시리도록 슬픈 영화다. 현실을 너무 잘 담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