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어려운 시기일 때 해외동포들의 역할이 크다. 미주 사회의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해외동포들이 남북관계를 평화로 만들어가는 데 일조해 줬으면 하는 취지로 오게됐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는 잘 알려졌지만, 미주 사회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선 오신 계기를 소개해달라.
– 개성공단 전문가로 알려졌다. 어떤 연유로, 언제부터 관련을 맺게 됐는지 설명해달라.
2008년 2월부터 들어가서 2011년까지 있었다. 직접적인 배경은 청와대에서 5년 동안 남북관계 국장과 비서관을 하고 했는데, 우리 사회와 정부가 북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또한, 통일평화문제 학자로서 제대로 북측 사회의 진면목을 보고 싶었다. 그들의 권력구조, 사회적 메커니즘, 생활양식, 가치규범 등에 관한 이해를 실질적으로 하기 위해 자진해서 들어갔다.
– 개성공단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했나?
주로 월요일에 들어가서 평균적으로 1, 2 주 정도 있었고, 일이 바빠지거나 남북관계가 힘들어지면 2개월씩도 있었다. 그 생활을 한 4년정도 했다.
북한학자 입장에서는 그만한 곳이 없었다. 공식적인 업무가 대북협상 담당이었는데,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대북정책을 다 파기하는 때에 개성에 들어갔다. 대북협상이 진행되는 게 거의 없었고, 기존의 합의들도 다 조정하는 상황이었다. 북측이 매일같이 “남과 북의 합의를 왜 남측이 지키지 않느냐?”라고 매일같이 나를 옥죄는 데 더이상 할말이 없었다.
솔직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가장 열심히 한 것은 ‘유사시에 개성공단을 어떻게 닫을 것인가?’만 연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성공단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사건만 있으면 어떻게 닫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게 가장 힘든일이었다.
그나마 북한체제를 연구하는 학자 입장에서 본다면, 북측을 만나서 연구할 수 있는 굉장한 시기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걸로 버텼다.
– 개성공단과 관련해 근로자 임금이 핵작업으로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최초의 임금이 얼마로 책정되었나?
기본임금 설정이 아주 중요하다. 당시에 청와대가 개성공단 기본임금 수준을 협상을 해야 하는데, 적정임금을 조사했다. 조사대상이 중국, 베트남, 그리고 개성공단에 직접 들어갈 기업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적정 임금을 나름대로 산정했다. 2003년 기준으로 200불 정도면 되겠다 했는데, 북측은 50불을 제안했었다. 50불이면 충분하다고 했다.2003년도에 협상을 할 때 노동규정 속에 임금이 들어가 있었다. 임금은 최저 임금 기준이 아니라, 연차에 관계없는 기본임금 중심이었다.
개성공단에 대한 사회의 보편적 인식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 615 공동선언의 옥동자라고 이야기하면서 개성공단을 평화프로젝트인 동시에 경제 프로젝트라고 이야기한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과연 북측에도 개성공단을 돈 때문에 했을까? 저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정말 돈이 목적이었다면 안했을 것이다.
개성공단은 북측이 하자고 한 것이 아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중국의 고도 성장속에서 노동집약적 산업이 다 무너지고 있다며 우리가 부탁해서 한 것이다. 기본 출발이 그것이다. 또한, 처음에 남북이 2천만평을 하자고 했다. 1단계로 백만평을 북측에서 토지를 내놨을 때 공짜로 내놨다. 우리는 토지 보상비를 줄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했다. 그런데, 그들이 임금을 받아서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었겠는가?
– 이런 사실들이 남측 사회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렇다. 분단체제 속에서 남북관계는 북한을 구조적 무지와 체제적 왜곡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제는 노력하면 조금 달라지겠지만, 지금까진 그랬다. 그 간극을 좁힐 수가 없다. 그래서 분단을 ‘체제’라, ‘구조’라고 말한다.
개성공단에 십 년된 사람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서울에 있는 와이프였다. 왜? 무슨 일만 벌어지면 “ 돈도 싫어. 억류될 거야”라며 전화가 온다. 10년 동안 개성공단에 있던 사람이 자기 와이프 한 명을 설득시키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남북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적대적 분단체제인 것이다. 그만큼 이해가 안되는 영역이다.
– 개성공단이 가진 의미와 영향은 어떤 것이 있는가?
개성공단은 우선 남북 공동의 평화의 제도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두번째로, 경제의 관점을 들 수 있는데, 구조적 저성장에 빠져있는 대한민국 경제의 활로의 모색이었다. 중국의 고도성장 속에서 노동집약적 산업은 다 무너지고, 경쟁력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개성은 그야말로 블루오션이었다.
세번째가 안보의 관점이었다. 개성공단엔 남측 4천명, 북측 5만 4천명 정도가 늘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천안함, 핵, 위성 문제 등 남북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때 개성공단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을 억제하고 완충시키고 제동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게 안보적 가치인데, 국민들은 잘 몰랐다.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때 전면적으로 촉발될 수 있는 여지를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기능을 했다는 게 개성공단의 안보적 관점이다.
마지막으로 개성공단은 60년간 쌓인 체제의 다름과 오해, 갈등과 불신을 이해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서로 모르면 오해하고, 오해하면 갈등과 불신이 생긴다. 그런데, 남과 북의 주민들이 같이 일을 하게되면, 시나브로 남과 북을 똑같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통일평화문화의 미래적 가치’이다. 매일매일 개성공단은 오해들이 이해들로 승화되어가는, 그래서 통일과 평화의 작은 사례들이 매일 발견되고 축적되는 통일평화문화의 미래적 창, 미래적 가치였다. 그게 아마도 가장 큰 개성공단의 상징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많은 평가가 있지만, 저는 개성공단의 본질적 가치와 실체적 의미에 대한 무지가 낳은 정책적 실패 내지, 정치적 자해행위라고 본다. 실은 ‘애초부터 닫고 싶었던 것을 이번에서야 명실상부하게 닫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박근혜 정부가 위기상황도 아닌데, 왜 그렇게 서둘러 철수했다고 보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들어오자마자 개성공단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기업들이 이미 투자한 금액이 1조 3천억원 정도였으니 어떻게 하지도 못했다. 대신, 2008년 MB 정부가 출범하고 얼마 안되어 ‘우리가 일방적으로 개성공단을 닫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피해가 얼마정도인가’라는 주제로 연구용역을 통해 비밀스럽게 조사했다. 잘 돌아가는 개성공단을 왜 일방적으로 닫았을 경우를 조사했겠는가?
대외비 연구 용역의 결과는 “닫으면 안된다”라고 나왔다. 그리고, 대안으로 ‘확산시키지 말고, 신규투자 하지 말고, 기존의 것들 중심으로 동결조치해라’를 채택했다. 그래서 선포는 하지 않았지만, 2008년부터 신규, 추가 투자를 아무것도 못하게 했다. 이때부터 기회만 있으면 닫고 싶었던 거라고 본다.
– 2013년 일시적으로 닫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되는가?
2013년에 6개월 동안 문을 닫았었다. 북측에서 일방적으로 닫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당시 국방부 장관이 “북측이 우리 남측 근로자들을 억류, 인질화 할 것이다”라는 것을 언론에 흘리면서 미국과 같이 훈련을 했다.
북측은 “동결도 모자라, 실질적인 발화점을 만들려고 하는가? 정말 유사시에 억류·인질화할 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데리고 나가라. 그 정도 신뢰로 무슨 남북 공동공단을 하느냐? 다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이게 2013년 6개월 동안 문 닫게 된 배경이다. 그래서 9월에 문을 열 때 첫번째 조항이 ‘남과 북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시는 누구도 일방적으로 닫지 않는다’였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닫았다.
– 개성공단이 재개될 가능성은 없는가?
다시 열릴 것이라고 본다. 물론 현 정부에서는 안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권이 교체된다든가, 여타의 객관적 조건이 바뀌면 다시 열릴 것이라 본다.
정리, 사진 : 양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