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 이야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던 자리에서 심사위원 중 한명이었던 이탈리아의 앨리스 로르워쳐 감독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2017년 칸 영화제에서 ‘행복한 라짜로’로 각본상을 받았는데 두 영화가 감독의 눈물샘을 자극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나 다니엘 블레이크’(감독 켄로치 2016년), ‘더 스퀘어’(루벤 외스틀룬드 2017년), ’어느 가족’(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년)에게 황금종려상을 주면서 빈곤과 계급, 사회적 안전망으로서의 공동체 문제에 칸 영화제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라짜로(개신교식으로는 나사로)는 성서속 두 인물의 이름이다. 지극히 가난했지만 죽어서 천국에 갔다는 예수의 비유와 죽었다가 무덤에서 걸어 나온 비유 밖 사건에서 등장한 동명 이인이다. 영화 속 라짜로는 성서의 두 인물을 조합했다. 성서의 나사로가 겪었던 가난과 다시 태어남이 영화속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분)안에 녹아 든다.
영화는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으로부터 줄거리를 따왔다. 1980년대 초반 소작제도가 일찌감치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딴 농촌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사람들이 구조된 사건을 소재로 삼았는데 영화 속 시간도 그때쯤 머물러 있다.
담배농사가 주업인 조그만 농촌마을 인비올라타의 모든 농장은 도시에 사는 후작 부인의 소유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가난과 빚에 허덕이는 점은 현대 산업사회 구조와 똑같다. 후작부인이 소작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농촌 어린이들에게 도덕과 성경을 가르치는데 기득권 수호에 복무해 온 그 ‘버릇’의 연장이다.
착취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점에 영화는 주목한다. 착취가 그들이 누리는 지위를 유지하려는 생존본능에서 나온다면 중하위계급의 착취는 노동의 무게에 짓눌려 죽지 않으려는 생존의 선택이다. 가정부 자리를 놓고 다툰 기생충도 마찬가지다. 농민들이 착취도구로 삼는 인물은 라짜로 였다. 혼자 사는 청년 라짜로는 동네 사람들의 영원한 머슴이다. 너도 나도 어린아이들까지 뭔가를 시키기 위해 또는 놀리기 위해 라짜로를 부른다. 하지만 그가 병에 걸렸을 때 그에게 곁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작의 아들 탄크레디가 요양을 위해 이 마을에 오면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수탈하는 엄마와 라짜로를 소비하는 농민들은 똑 같다고 본 탄크레디와 라짜로는 가까워 진다. 영화는 탄크레디를 계급문제에 뒤늦게 눈 뜬 정의로운 상류층 청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 역시 바보같은 라짜로의 순수함을 이용하는 다른 형태의 착취자일 뿐이다. 탄크레디는 엄마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납치 자작극을 벌이고 이를 눈치챈 후작부인은 자신의 착취가 드러날까 경찰에 신고를 꺼리지만 결국 출동한 경찰에 의해 이 마을의 전모가 밝혀지고 농민들은 해산된다. 이 과정에서 절벽에서 추락했던 라짜로가 정신을 차려 보니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라짜로가 차를 얻어타고 도시로 나왔을 때 시간은 20년이나 흘러 있었다.
이 영화는 요즘 유행하는 타임슬립(Time Slip)영화의 형태를 띠지만 실패한 사랑, 미해결 범죄를 다루기위해 다른 시간 대를 오가는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 제목처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것이 아니라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이다. 도시로 나온 라짜로는 20년 더 늙어버린 옛날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좀도둑질로 연명하는 등 빈민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다룬 우화인 라짜로 이야기는 세 가지 화두를 전하고 있다.
첫 번 째로 ‘어느 시간 대가 본래 시간대인가’이다.
20년전 농촌에서 현대로 시간이 넘어온 소재를 “ 노골적인 착취의 시대에서 더 새롭고 유혹적인 착취의 시대”로의 시간 여행으로 감독은 설명했다. 감독의 의도와 달리 본래 현대에 살던 라짜로가 옛날로 시간여행을 잠시 다녀왔다는 상상도 가능하다. 감독의 의도가 맞지만 옛시대의 착취는 노골적이었고 현대는 유혹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빈약하다.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과거는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되어 가난하던 시절이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왜곡된다. “옛날에는 그래도 우리 좋았는데”라고 많은 사람들이 유혹적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기억의 허위에 속지 말라고 라짜로는 항변한다. 그 왜곡된 기억 속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는 미화되고 일본은 한국을 근대화시킨 나라로 둔갑한다. 발터 벤야민의 지적처럼 과거는 개혁을 추동하는 해석으로만 작동해야 한다. 과거는 추억이 아니라 해석으로만 소환되고 그 토대 위에서 미래는 열려 있어야 한다. 코로나 사태는 과거의 모든 모순이 축적되어서 폭발직전까지 온 종말론적 징후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개방의 기회다.
신선들의 세계과 같은 무릉도원에서 며칠 살다가 마을로 돌아와보니 낙원도 사라지고 현실도 그 때의 현실이 아니었다는 얽개는 어디가 실제고 어디가 시간여행을 온 곳인지 모호하게 다가온다. 워싱턴 어빙의 소설 ‘립반윙클’도 비슷한 내용이다. 미국 독립 직전 허드슨강 유역에 살던 립반 윙클이 사냥을 갔다가 산속에서 네덜란드 선조들을 만나 이들과 즐기다가 술이 깨니 20년의 세월이 흘러 미국이 독립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도 두 세계 즉 네덜란드가 지배했으면 하는 립 반 윙클의 마음과 현실적으로 영국이 지배하던 미국에서 깨어난 세계(독립한 미국)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의 고민이 담겨 있다.
어느 시대든 오늘을 살아가면서 그 모순과 직면하는 삶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수야 말로 모순과 직면하다가 어두운 무덤에 갇혔지만 부활로 미래를 열었다.
두번 째 화두는 ‘잡초와 늑대’다.
영화에서는 늑대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라짜로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늑대가 그를 발견한다. 그에게 다가간 늑대는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잡아먹으려 하지만 처음 맡는 냄새에 멈춘다. 무슨 냄새였을까.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다.”라는 내래이션이 흐른다.
후작 부인이 거짓 예언자라면 선한 사람에게는 다가 가지 못하는 늑대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공포 영화에서 보름달과 같이 나오던 늑대가 여기서는 라짜로를 보호하는 존재다. 늑대의 Wolf와 자궁의 Womb는 같은 어원 woe(으르렁대다)에서 나왔다고 한다. 보름달은 여성의 생리 주기와도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늑대가 공포영화에 등장했던 것은 여성을 마녀 또는 요물로 보던 과거의 답습이다. 이 여성감독은 그런 편견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늑대를 착한 라짜로를 보호하는 여성적 존재로 다룬다. 남성적 신이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싸움을 걸오 오는 신이라면 여성적 신은 선함을 보호하는 신이다.
옛 주민들의 기억 속에 라짜로는 잡초로 요리를 할 줄 아는 인물이다. 20년 뒤 세계에도 변함없이 가난한 그들에게 잡초로 요리를 해주는 라짜로는 현대판 성자다. 윤구병의 ‘잡초는 없다’, 황대권 ‘야생초 편지’처럼 버려진 것들이 우리를 살린다. 보잘 것 없이 버려진 것들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게 믿음이다. 가장 큰 버려짐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게 부활 신앙이다.
세번 째 화두는 ‘농장관리인과 냇물’이다.
후작 부인을 대신해 농민들을 수탈한던 농장 관리인은 20년이 흐른 세상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예속되어 있다.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감시하던 관리자 유대인은 카포, 존더코만도,무젤만 등 다양하게 불렸지만 그 어원은 추측만 무성할 뿐 아는 사람이 없다. 자기 직책의 명칭도 불투명한 이들이 동족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가 나중에는 그들도 희생되었던 것처럼 농업사회, 산업사회 할 것없이 상위계급을 위해 복무하는 이들은 자신들도 이름없는 존재로 똑같이 취급된다는 사실을 그들만 모른다.
우리 고국의 언론이 이런 존더코만도의 역할을 충견스럽게 잘 감당하고 있다. 중간에서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여론을 조작하는 일 따위를 하고 있다. 자기들의 욕망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언론의 논조에 예속되지마 욕망을 털어버린 텅빈 진리인 라짜로는 그래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개울만 건너면 새로운 세상(그곳도 새로운 세상은 아니었지만)을 만날 수 있는데 무릎에도 채 못미치는 얕은 개울을 건너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었다. 과거의 큰 홍수 때 다리가 떠내려 간 것과 그때의 성난 물줄기가 농민들의 기억을 지배해 왔다.
현재를 사는 라짜로는 도심지에 있는 성당을 찾았고 그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성당을 나서는 라짜로 뒤로 음악이 따라온다. 성당과의 거리가 멀어져도 음악은 길 위에 흐른다. 신비로운 기적의 장면이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타락해도 신성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거룩함이 함께 한다는 의미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거룩함이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빈 자리에 의학 용어와 통계수치가 자리잡았다. 거룩함을 포장한 남성적 저주와 혐오를 일삼던 가짜 교회들이 기세 등등해 왔다. 가짜들은 후작 부인이 농민들의 각성을 두려워 했던 것처럼 새로운 가치를 ‘세속’이라 호명하며 차단했다. 이 과정에서 교인수와 자본과 같은 숫자에 예속된 그들이 가장 먼저 ‘영업 이득을 얻는 업소’로 세속화되었다. 미국은 아직 숫자와 싸우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 코로나 통계 수치가 위로를 주는 현실에서 교회가 선호하는 수치는 아무런 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마땅히 전해져야 할 신성한 위로 조차 설 곳을 잃어 버렸다. 교회가 말할 수 있는 것이 고작 safer at home 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겪는 것을 말세의 징표가 아니라 새로운 개방의 징표다. 갇혀있던 예수가 무덤을 뚫고 나왔고 하늘과 땅이 닿았다. 그 순간 과거를 추억으로, 늑대를 공포로, 잡초를 하찮은 것으로, 냇물에 다리가 없으면 건너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우리의 고정관념도 하늘에 닿는 순간 해체될 것이다. 그제서야 라짜로는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