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보다 성공에 집착하는 84년 이후 교회를 주목하라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별세했다. 모두가 고백하듯이 우리 모두는 그에게 빚을 졌다. 그런데 감히 이근안이라는 추한 이름이 그의 별세와 함께 다시 회자된다. 김근태의 죽음이 모두를 분노하게 하지만 그는 고문 피해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자다. 그런데 이근안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에 대한 비난은 한국 교회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김근태가 이근안과 함께 거론되는 것이 격이 안 맞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근안 뒤에 있는 한국 교회라는 거대한 기득권 세력에 주목하고 싶어 한다.
한국 민주화의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지대했다.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을 비롯해서 한명숙·이태영·박영숙·박순경 등이 기독교 여성운동을 이끌었다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의 기독교인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그들의 삶을 바쳤다. 문익환·문동환·김재준·장준하·함석헌·박성준 등등 헤아릴 수 없지만 오늘 한국 교회는 이근안이라는 이름 하나에 휘청거린다. 그리고 이른바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지키기보다는 나는 이근안류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함께 비난하는 데만 동참한다.
그런데 정말 이근안만이 한국 기독교의 공적일까? 어떤 보수언론은 이근안이 단칸방에 살 정도로 말년에 고생한다며 그 역시 피해자라는 보도를 했단다. 김근태의 별세에서 이근안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 멍석은 진보언론도 깔아주었으니 그들의 논조를 탓할 일은 아니다. 보수언론은 오히려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보수체제 전도사가 되어 부흥회를 하고 다닌들 수입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의 논조(혹은 보수언론의 논조)가 먹히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보수 언론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반성이 요구된다. 한국 교회는 반공 수구보다 더 큰 병에 들어 있는 것을 못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계에 87년 이후 체제라는 용어가 있다면 한국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4년 이후 체제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1974년 여의도에서는 엑스폴로 74대회라는 큰 전도행사가 열렸다. 당시까지 기독교 교회 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권력과 어느 정도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주류 교단들은 이 행사에 큰 위기감을 느낀다. 비주류 교단에 의해 치러진 교회 연합행사에서 주류 교단이 그동안 해내지 못했던 거대한 에너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난 뒤 한국 교회는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대회를 열면서 또 한 번 세를 과시한다. 74년 대회와의 차이점은 주류 교단이 참여하면서 비주류 교단의 조용기 등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74년 대회에서 위기감을 경험한 주류 교단은 이 대회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한경직·강신명·강원용 등이 주제 강사로 나서고 빌리 그래함이 주강사로 다시 초대 되었다. 민족통일과 평화, 교회 개혁 등 사회적 이슈도 주제로 채택되었다.
74년 이후 새로운 교회 문화 앞에서 머뭇하던 기존의 대형교회들도 이 대회 이후 경쟁시장에 뛰어든다. 민족 통일, 평화, 교회 개혁 얼마나 멋진 주제들인가? 대형 경쟁에 뛰어든 교회에게 면죄부를 주기에 말이다. 동네 구멍가게를 다 망하게 해놓고 이웃돕기 특별 이벤트를 벌이는 대형마켓이 겹쳐지지 않는가? 당시 가장 시급한 주제는 독재 타도였지만 이 대회에서 누구도(강원용조차도) 그것을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대형화를 향한 무한 경쟁이 몇몇 윤리적인 이슈들로 희석되면서 교회는 윤리와 성장이라는 두 날개 위에 비상하게 된다.
지금 한국 교회가 정상이라고 분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른바 진보적인 신학계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들의 분석 프레임이 대부분 84년 이전에 매여 있다. 진보 보수의 프레임이나 반공주의, 서구신학의 영향을 받은 연구실 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아 살아있는 현장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교회를 사회 문제와 연결시켜 분석하는 뛰어난 학자는 한신대의 강인철이다. 그는 한국교회와 반공의 관계를 정말 풍부한 데이터를 가지고 정확히 분석해 내었다. 그러나 반공이 오늘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인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적어도 현대 한국 기독교의 문제에 대한 분석은 1984년 이후 체제를 모르고는 설명될 수 없다.
한국 교회 반공의 첨병 맞다. 그러나
제3세계 그리스도 연구소장인 김진호는 강인철의 글을 인용해 한국 교회의 반공주의를 분석한다(<한겨레21> 837호). 신사참배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죄책감이 반공을 불렀다는 그의 주장은 신선하지만 친일파들이 반공주체 세력이 된 해방 후 정치 환경에서 보면 모두가 그랬지 교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반공의 첨병이 된 한국 교회는 21세기에도 젊은이들에게 빼앗긴 시청 앞 광장을 탈환이라도 하듯이 때가 되면 친미 반공 집회를 갖는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평화 기조 덕에 젊은이들은 반공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지난 몇 번의 선거에서 확인되었다.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반공집회에 그렇게 예민할 필요가 없다. 누가 보아도 그러한 행사들은 한국 교회의 교인수를 줄이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84년 이후 체제에서 성장한 교회들은 이러한 행사를 외면하거나 적극 참여하지 않는다. 김동호·하용조·이재철·옥한흠 목사 등은 요즘 하는 말로 이들과 ‘컨셉’이 다르다. 김동호는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한 김홍도를 향해 그렇게 김일성을 욕하면서 당신도 똑같지 않느냐며 대놓고 묻는다. 이처럼 84년 이후에 성장한 고학력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한마디로 세련되었고 반공이 주제가 아니다. 이것을 모르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반공으로 묶으려는 분석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교회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뜬금없는 말일 뿐이다.
84년 이후 교회들은 반공보다는 성공이라는 보다 세련된 주제에 집중한다. 어느 화려한 극장 못지않은 교회 시설에 익숙해져 있는 교인들을 시청 앞 차가운 아스팔트로 내몰지 않는다. 그 교회 교인들은 선교 봉사 나눔 등에서도 모범을 보인다. 그들의 숨겨진 욕망을 감추려는 듯 기도에 열심이다.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치열한 현장에서 대학을 다닌 세대들 중 대부분은 그때 투신하지 못하고 졸업과 취업의 길을 순탄하게 걸어온 것에 대한 죄책감들이 있다. 그 죄책감은 사회 정의와 개인의 성찰을 위해 필요한 죄책감이다.
그런데 84년 이후 성장한 교회들은 이런 죄책감을 영적 죄책감으로 대체시킨 후에 그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주면서 허전함을 선교나 봉사와 같은 것들로 채워 준다. 그 프레임 속에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별 고민 없이 무한 경쟁에 뛰어 든다. 그리고 자신들이 고학력으로 누렸던 그 성과물들을 자녀들에게 세습시키기 위해 사교육 시장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며 교회는 이들의 고득점을 위해 입시 기도회를 여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일부 ‘건강한 교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신의 또 다른 이름인양 그것에 집착한 교회 개혁 운동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다.
84년 이후 체제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이처럼 좋은 교회와 나쁜 교회가 확연히 구분된다. 반공의 첨병인 교회들은 나쁜 교회이며 세련으로 무장된 교회들은 좋은 교회가 된다. 그런데 과연 남북분단 이후 월남자들이 주축이 된 반공적인 영락교회가 자본주의로 무장된 84년 이후 교회들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목회자들이 즐겨 쓰는 예화에는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담그면 금방 튀어 나오지만 천천히 데우면 거기서 익혀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산층 이상의 세련된 기독교인들은 시청 앞에서 보수 기독교인들이 치르는 그 촌스러운 행사를 보고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 뜨거운 물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첨병이면서 적당한 선행을 하는 교회 구조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84년 이후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우리는 ‘좋은 교회’ 안에서 천천히 익어가게 된다.
조영남·윤형주라는 키워드
70년대 이전까지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딴따라’라는 이름으로 무시당했었다. 그러나 조영남의 출현은 딴따라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도 TV프로에 나와서 자신이 서울대 음대 출신(실제로는 중퇴)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그에게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는 남다르다. 윤형주는 평준화 이전 최고의 명문고였던 경기고 출신에 연세대 의대 재학 중인 가수였다. 게다가 윤형주의 부친은 저명한 영문학자였으며, 윤형주는 일제하 저항시인 윤동주와 육촌간인 이른바 명문가 자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명문대 출신의 연예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희준이라는 서울대 법대 출신의 가수가 있었지만 그의 음악세계나 무대 의상은 당대 저학력 가수들의 그것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반면 조영남·윤형주·양희은(경기여고 서강대) 김민기(경기고 서울대 )의 음악세계와 일상복과 다름없는 무대 의상은 다른 가수들과 달랐고 대중예술계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마침 경제성장과 함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넓어지던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음악이 지성인들의 문화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이들이 바로 고학력 가수들이었다.
그중 조영남과 윤형주는 모교회 학생부 성가대 출신으로 기독교인임을 공공연하게 이야기 하고 다녔다. 그 덕분에 교회에서도 조금씩 복음성가나 기타연주가 시도되었다. 당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유명하던 새문안교회에는 쌍투스라는 노래 동아리도 생겨났고 이들은 1978년 대학가요제에도 출전한다. 교회 내 음악동아리가 교회 합창제가 아니라 대학 가요제에 나간 것이 나는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1974년 조영남은 인기 절정에서 신학공부를 결정하게 되면서 유교적 엄격주의가 지배하던 한국 교회 예배 의식에 대한 대중들의 생각도 바뀌게 된다. 이미 지성인도 연예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그는 쇼와 예배가 한 사람 안에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준 첫 인물이었다. 그의 학벌은 이러한 교회 문화가 나쁘지 않은 것임을 뒷받침 해주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84년 이후 성장한 교회들은 대중문화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예배에 도입하고 성공을 거둔다. 전통적인 예배 의례의 퇴조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는 했지만 조영남은 한국 교회에서 이런 것을 앞당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만약 엑스폴로 74대회에서 조영남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남진이나 나훈아의 회심이 있었다면 84년 이후 성장한 교회에서 대중문화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정착하지 못했거나 그 구성원들이 70년대 순복음과 비슷한 구성원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 분위기 속에서 중산층 기독교인들은 교회 내 대중문화를 즐기면서 그것이 일반 대중문화와는 다른 것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비기독교인들과 똑같은 욕망을 가지면서 그것은 다른 것이라고 믿는다. 84년 이후 교회들은 이런 점을 신도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연예시장의 확대와 고학력자들의 연예계진출은 84년 이후 새로운 교회 문화의 정착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많은 시상식장에서 대중연예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수상소감을 하는 것이 그것을 실증한다. 고학력자들의 문화적 향유와 욕망은 개인의 적선 윤리로 덮어지며 그 화려한 무대에 속한 이들은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는 84년 이전 체제를 유지하는 교회들과 차별화된다.
한국 기독교의 진짜 위기
한국 교회의 진짜 위기는 반공주의도 아니고 이근안 따위도 아니다. 금란교회의 김홍도가 거액을 들여 조선일보에 광고를 해도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런데 왜 기독교가 이 모양이냐고? 고학력 중산층 기독교인들이 성공주의와 편의주의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적당한 선행에 성공을 향한 그들의 욕망은 감추어진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기득권을 계승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신앙 교육 환경도 최상의 조건으로 만들어 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신심이 초월적 영성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들이야말로 나라가 좌파천국이 될까 걱정하는 반공주의 기독교인들보다도 공동체에 대한 희생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진보적 기독교 논객들은 간과하고 있다.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이 남편의 영전에 성경책을 펴놓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 행위 자체는 하나의 의례(ritual)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적인 고백으로 보였다. 진보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근안이나 ‘빤스목사’에 대한 비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복음을 혼돈하는 교회에서 서서히 익어가고 있는 이웃들을 구출해 내는 일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새로운 영성과 참여 모델 개발이 진보의 탈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김기대 / LA 평화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