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2017년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프랑스 영화 엘르(Elle), 감독인 폴 버호벤은 여자 주인공을 캐스팅하면서 미국 배우 니콜 키드먼, 르네 젤웨거 등에게 출연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읽어본 미국 배우들은 출연을 고사했다. 하는 수 없이 영어 영화로 제작하려던 계획은 포기하고 프랑스어 영화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녀들은 거장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일단 엘르는 불편한 영화다. 아니 보기에 따라 (반여성주의적인) 혐오스러운 영화일 수 있다. 영화는 주인공 미셸(이자벨 위페르)이 집에 침입한 괴한으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데 폭행 후에 미셸이 보인 행동은 보통의 피해자와 다르다. 울면서 두려워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거나, 개인적으로 복수에 나서지 않고 미셸은 금방 일상으로 돌아간다. 반항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물건들을 청소하고 목욕을 하고 초밥을 먹으러 간다. 다음 날부터 그녀는 늘 그래왔듯이 성실한 게임회사 대표로 살아간다.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할 때 여성들이 반항하는 듯해도 실제로는 좋아한다고 믿는 일부 남성들의 뒤틀린 의식을 증명하는 듯한 장면도 있다.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영화의 주제가 그런 것 일리는 없을 터, 그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들이 연기력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미국 배우들은 자신이 없었나 보다.
만약 한국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폭행당한 여성의 심리를 왜곡했다고 상영 취소를 요구하는 시위가 감독 집 앞에서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고 주연 배우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오점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한국 영화라면 전도연 밖에 미셸 역을 맡을 사람은 없어 보인다. 전도연은 영화 ‘해피 엔드'(정지우 감독, 1999)에서 미묘한 심리를 잘 담아 냈다. 최민식(극중 서민기역)은 불륜을 벌이는 아내 전도연(극중 최보라역)을 살해하고 내연남인 주진모(극중 김일범역)를 범인으로 조작한다.
불륜은 나쁘지만 살인은 더 나쁘다. 하지만 영화는 제목을 ‘해피 엔드’로 정함으로써 아내의 불륜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폭력적 시각을 비웃는다. 관객 역시 최민식이 벌이는 완전 범죄의 공범이 되어 불륜 아내를 죽이는 남편의 계획에 동화되어 간다.
성폭행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이중적 시각
성폭행당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각도 이중적이다. 남성들은 폭행당한 여성에게 항상 같은 수준의 심리상태를 바란다. 상처를 영원히 안고 살아가면서 끔직한 순간을 기억 속에서 지워내지 못하는 여성상 말이다. 그렇게 미리 예단해 놓고 자칭 페미니스트적 시각을 가진 남성들은 여성의 상처를 위로한답시고, 남성의 폭력적 여성관을 목청껏 비판한답시고 기억을 후벼 판다. 성폭행 당한 여성이 이전과 변함없이 행동할 때 여성의 용기를 높이 사기보다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게 사내들의 근저에 깔려 있는 이중적 심리다. 결국 여성들은 상처 속에서 살아가도록 강요됨으로써 두 번의 피해를 입는다. 이처럼 피해자의 자격과 처신 방법도 남성들이 정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여성들 조차 피해 여성을 돕는다면서 피해자를 이러한 틀에 꾸겨 넣곤 한다.
이처럼 세상은 어떤 행위를 당한(혹은 행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대응만을 요구한다. 그래서 ‘성폭행 피해자스러움’의 정형이 있는데 ‘엘르’는 그것을 깨버린다. ‘엘르’는 프랑스어로 ‘그녀’라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그녀’는 각기 다른 ‘그녀들’인데 사회는 ‘그녀’라는 대명사안에 모든 여성을 일반화시켜 버린다. ‘그녀’는 ‘그녀들’의 종속 개체가 아니라 독립 개체 ‘그녀’인데 세상은 ‘그녀’와 ‘그녀들’을 동일시 한다.
미셸이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39년 전 평범한 주민이었던 미셸의 아버지는 자신의 동네에서 무차별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현재 종신형으로 수감중이다. 당시 언론은 어린 미셸까지 뉴스에 노출시키며 흥미 위주의 보도를 했다. 이후 미셸 가족에게 남은 것은 수모와 손가락질 뿐이었다.
(이제 부터는 강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셸이 성폭행 사실을 신고한다면 뉴스는 ‘연쇄 살인범의 딸, 성폭행 당하다’, ‘강간당한 유명 게임회사 대표가 연쇄 살인범의 딸이었다니!’ 등으로 헤드라인을 뽑을게 뻔했다. 일부 황색 언론은 ‘강간 스토리 담은 새 게임 출시 앞두고 대표가 자작극?’ 이런 제목을 뽑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아버지가 가석방을 신청해 놓은 상태여서 39년 전 그 일이 대중에게 다시 회자되고 있는 시점도 안 좋다. 뉴스, 아니 세상이 보고 싶어하는 부분을 잘 아는 미셸에게 경찰 신고는 기름을 붓는 격이다.
회사에 출근한 미셸은 일단 자신의 정책에 반기를 든 젊은 남성직원부터 시작해서 주변 인물들 중심으로 범인 색출을 시작한다. 복면을 썼을 때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일에만 매달려 있지 않고 새로 출시할 게임의 최종 승인을 놓고 직원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 게임 속 여자 캐릭터는 강간을 당하고 있는데 미셸은 그 캐릭터의 얼굴에 오르가즘을 더 강하게 묘사하라고 젊은 남성직원들을 닦달한다.
이 와중에 가까운 친구의 남편과 몇 개월 째 불륜을 벌이고 있으며 잘생기고 성실한 이웃 남성 파트릭을 몰래 숨어서 바라보면서 자위행위를 한다. 파트릭을 집에 초청해 놓고서는 아내가 버젓이 함께 앉아 있는 테이블 밑에서 발로 그의 허벅지 사이를 공략(?) 한다. ‘저런 사람이니 성폭행을 당해도 그렇게 당당하지!’라는 생각을 관객들이 빨리 갖도록 감독은 도발한다.
성폭행범이 또 찾아왔고 세 번째 찾아왔을 때 미셸은 저항하면서 남성의 복면을 벗기는데 범인은 미셸이 유혹하던 이웃집 파트릭이다. 미셸은 신고하지 않았고 복면을 쓴 파트릭의 폭행과 미셸의 저항은 이후로도 몇 번 지속된다. 상대방이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계속되는 성폭행, 그러나 신고 하지 않는 역겨움이란. 여성들의 분노와 남성들의 착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미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파트릭은? 그들은 SM(가학성 피학성 성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인가? 복면은 썼지만 서로가 아는 상태에서 폭력과 저항이 일어나고 있을 때 마침 집에 돌아온 미셸의 아들에 의해 파트릭은 살해된다. 파트릭은 이 폭력을 쾌락게임으로 이해한 듯 억울해 하면서 죽어간다. 그 동안의 진행을 모르는 아들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미셸
미셸 아버지 조르주의 죄를 미셸이 감당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로 인한 죄책감의 무게는 평생 그녀를 짓눌러 왔다. 게임 캐릭터를 통해 묘사하려고 했던 성폭행 당하는 여성의 얼굴에 나타나는 환희의 표정은 미셸의 마음이다. 살인범 아버지를 둔 자신의 상처는 누군가로부터 모멸적인 폭행을 당해야만 해소될 것 같다는 그 마음이다.
그런데 실제 상황이 자신에게 발생했다. 아버지의 살인으로 죽어갔던 사람을 생각할 때 자신이 누군가의 폭행의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은 일종의 ‘씻김 굿’이다. 파트릭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면서 내가 왜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몸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마음은 편해지고 막혔던 게임의 줄거리도 잘 풀려 나간다. 마음이 편해진 미셸은 친구에게 네 남편과 불륜을 벌였다는 사실도 고백하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면회 가서 이제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고 말하고 싶은 용기도 생긴다.
불편하다. 성폭행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이지만 미셸에게는 자기 정화의 의례였다. 미국 배우들이 출연을 고사한 지점이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감독은 이 불편함에 종교적 메시지를 더한다.
조르주는 39년 전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려 사람이 나오면 그들을 이유 없이 죽였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월절 그날의 사건이다. 야훼의 대리자는 출애굽이 있던 전 날 문에 양 피가 묻어 있는 집은 살려두고 그렇지 않은 집의 장자는 모두 죽였다. 그날의 ‘문’이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상징이지만 이유없이 당한 이집트인들에게는 거대한 폭력의 흔적이다. 야훼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조르주는 가석방을 요구한다. 다시금 세상에 개입하고 싶다는 의미다. 하지만 법원이 가석방을 거부하자 그는 이튿날 감옥에서 자살한다. 니체는 신을 죽였지만 ‘엘르’는 세상에 개입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신이 스스로 죽게 만든다. 39년은 유월절로부터 40년이 되어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직전 죽은 신의 대리인 모세를 떠 올리는 숫자다.
파트릭의 아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프랑스에서 가까운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방문하자 그를 만나러 갈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집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데 동방박사가 흑인이다. 백인 가톨릭 신자가 흑인 동방박사 모형을 크리스마스 장식에 사용한 점만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향을 받아 열린 마음을 가진 인물인 듯하다.
그녀는 살해된 강간범 남편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면서 미셸에게 의미 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에게 필요했던 걸 미셸 당신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아내의 종교성이 싫었던 남편은 이웃집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디스트 놀이를 하고, 미셸은 속죄 놀이를 하며, 파트릭의 아내는 신의 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신의 역할 놀이에 빠져 남편의 가학적 성욕 해소의 도구가 된 미셸이 당한 폭력을 감히 ‘용서’한다. 또한 삶에서 생생하게 체득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흑인 인형 장식물로만 인종문제에 접근할 뿐이다.
반면 미셸의 아들은 임신한 여자 친구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는데 출산한 아이는 흑인이다. 여자 친구에게 속았다는 설정이 아니라 이미 임신한 여성과 교제를 시작했고 그 아이에게 아버지가 필요할 것 같아 결혼을 서둘렀다는 이야기다. 상대를 사랑하면 여인의 태중에 있는 아이까지 받아 들여야 한다는 예수 아버지 요셉의 마음이다. 아들은 잠시 이혼의 위기를 맞았을 때 아기를 자기가 키우겠다며 아기를 빼돌리기도 했다.
불편한 영화는 이렇게 구원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선포한다. 똑같은 사건은 있어도 똑같은 결론은 있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근원으로 삼는 종교 조차도 누구에게는 구원이지만 누구에게는 폭력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선택과 판단에서 한국 드라마의 흔한 장면처럼 남편의 내연녀를 찾아가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해법만 강요받고 있다. 남편이 미셸과 불륜관계였다는 것을 안 친구는 미셸 대신 남편을 버리고, 미셸도 친구의 남편을 버리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된다. 핀란드 영화 ‘블랙 아이스'(감독 패트리 코드위카, 2007)와 이 영화를 원작으로 한 한국 영화 ‘두 여자'(감독 정윤수, 2010)에도 이런 설정이 사용되었었다.
세상에 많은 ‘그’와 ‘그녀’들이 저지르거나 또는 당한 모든 경험을 ‘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동일하게 판단하는 일은 또 다른 폭력이다. 구원이란 파트릭의 아내처럼 교회나 책에서 배운 내용에 있지 않다. 미셸처럼 성폭행을 씻김의 기회로 삼는 파격, 그녀의 아들처럼 애인의 아이까지 보듬는 사랑, 이처럼 내가 알고 있는 해법이 전부인냥 착각하는 통념을 거부하는 게 바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