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의 영웅 체게바라와 작가 헤밍웨이는 공교롭게 이름이 같다 (Ernesto와 Ernest). 진리(truth) 또는 심각하다(serious)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쿠바 혁명기에 함께 쿠바에 거주했으나 둘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마피아를 다룬 영화 ‘대부 2’에는 쿠바 혁명 장면이 사실감 있게 묘사되고 있다. 쿠바 카지노 사업에 진출하려던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분)는 당시 독재자였던 바티스타가 주최한 신년 파티(1959년 1월 1일) 에 참석했다가 피텔 카스트로가 이끌던 혁명군이 대통령궁을 접수하자 혼비백산 도망친다. 혁명은 정말 그렇게 ‘영화처럼’ 일어났다. 영화 속 마이클이 그랬듯이 미국의 도박 산업은 혁명 후 쿠바에서 철수하게 된다. 패배한 미국은 여러 차례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하는데 CIA는 불만을 품은 도박업자들을 ‘거사’에 끌어 들였다고 전해진다.
카스트로는 자신보다 체게바라를 혁명의 영웅으로 대접한다. 혁명광장에 카스트로의 얼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혁명광장을 비롯해 쿠바 전역에서 숭앙되는 존재는 체게바라와 호세 마르티다. 피델이 대통령궁을 접수하기 바로 며칠 전 체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산타 클라라 역에 진입하던 정부군이 탄 기차를 불도저로 탈선시켰을 때 혁명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혁명의 성지인 산타클라라에는 체게바라 기념관이 있고 카스트로의 노력으로 30년만에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옮겨진 체게바라와 혁명 동지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기념관을 돌아보고 나오면 체게바라와 동지들이 안치된 곳으로 안내된다. 체게바라 동지들의 사진은 조명을 받아 확인할 수 있는데 어두 컴컴한 곳에서 체게바라를 찾기가 쉽지 않다. 자세히 보면 다른 이들이 조명을 받는 반면 체의 사진 위에는 별 표시가 되어 있을 뿐 오히려 더 어둡다. 감히 전기 따위로 비출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일까?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2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타클라라로 가기 위해서는 쿠바의 시외버스 시스템(외국인 전용)인 비아술을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버스표를 구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창구의 직원은 퉁명스럽게 오늘 표가 없다는 말만 전한다. 비아술 건물을 나오면 불법 택시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다가와 호객행위를 한다. 우리 일행 3명은 밀고 당기기를 계속해 75 CUC( 80달러 정도) 에 합의했다. 시외버스비 18 CUC을 생각하면 비싼 가격은 아니다. 그런데 영어 구사능력이 있어 거래를 하던 사람은 택시 기사가 아니고 정류장 근처에서 택시를 연결해주는 이른바 ‘삐끼’였다. 일인당 5 CUC을 소개비로 징수하니 이 나라도 영어가 스펙의 하나가 된 듯 하다. 운전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우리 일행 한 명당 20 CUC, 자기 차인지 알 수 없으니 이 중 얼마가 순수하게 운전자의 몫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임금 노동자 월 개인 평균 소득이 20 CUC이라고 하니 택시 운전이 꽤 괜찮은 직업 같다. ‘영어하는 삐끼’는 더 괜찮은 벌이같고.
에어컨도 없는 낡은 차이기에 창문을 열은 채로 280킬로미터를 달리고 나면 얼굴이 얼얼하다. 내가 탄 택시에는 미국 국기를 하트 모양으로 오려 붙여 놓았다. 혁명 정신을 유지하려는 국가 공동체와 미국에 기대를 걸고 있는 젊은 개인은 이렇게 충돌하고 있었다. 고속도로 변에는 돈을 흔들며 차를 세우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연이어 있다. 대중 교통이 좋지 않으니 목적지까지 히치 하이킹을 하는 것인데 ‘공짜가 아니라 나 돈있다’고 의사를 밝히는 장면이다.
시엔 푸에고에서 아바나로 돌아오는 비아술 버스는 히론이라는 도시에 멈추어 선다. 처음에는 어딘지 몰라 군인들의 입영 집합소인지 알았다. 많은 관광버스와 군인들 학생들이 운집해 있던 이곳은 바로 히론 전투가 일어났던 성지였다.
1961년 4월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미국이 훈련한 1,4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 탈환을 위해 침공했다가 대패한 곳이 바로 히론이다. 100여명이 사망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 히론 전투 이후 쿠바는 급속도로 소련에 가까워 진다. 미국으로서는 악수를 둔 셈이다.
이처럼 쿠바 전역이 혁명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면 수도 아바나와 인근에서는 헤밍웨이 마케팅이 주 관광 산업이다. 헤밍웨이가 주로 들렀다는 술집 ‘라 플로리디따’, 아바나에 올 때마다 머물렀던 ‘암보스 문도스 호텔’, <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던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해변 마을 코히마르, 산프란시스꼬 뽈라의 헤밍웨이 박물관에서 헤밍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라플로리디따에서 헤밍웨이가 즐겨 먹었다는 모히토를 한 잔 마셔도 헤밍웨이는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 다른 집보다 비싼 술값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의 관광객들이 해방구를 맛보고(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을 다른 식당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시원한 에어컨이 반겨준다), 살사도 재즈도 아닌 미국식 막춤이 통로에서 난무한다. 헤밍웨이의 작은 흉상은 그저 ‘증명사진용’ 도구일 뿐이다. 나이트 클럽(일명 고고장)과 지금의 클럽 사이의 시대에 잠시 반짝했던 한국의 락 카페같은 분위기다.
아바나의 혁명 박물관에서는 살사를 비롯한 다양한 춤 강습이 무료로 열린다. 춤을 배우는 이들(대부분은 관광객들)이 춤을 통해 ‘춤과 함께 하는 유쾌한 혁명’을 상상할지 1959년 이전의 쿠바를 향수처럼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표정들만은 라플로리디따의 막춤을 추는 이들보다는 훨씬 진지하다.
쿠바에 머물다 아이다호로 돌아갔던 헤밍웨이는 쿠바 혁명 이후에 다시 쿠바로 돌아왔다. 1960년 5월 15일에는 그의 이름을 딴 헤밍웨이 낚시 대회(1950년에 처음 시작, 올해 66회 대회가 6월 13일부터 열린다)에서 카스트로와 만나는데 그 때 사진은 자료 사진으로 남아 있다.
헤밍웨이가 쿠바를 다시 떠나게 된 것은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이라고 헤밍웨이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1962년 그는 아이다호 자택에서 엽총으로 자살한다. 석연치 않은 죽음에는 늘 음모론이 뒤 따르는 법, 헤밍웨이의 자살은 카스트로 정권과의 관계를 캐내던 FBI의 과잉 수사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아직도 회자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던 존 F 케네디의 죽음에 쿠바가 관련되었다는 설도 여전히 힘을 받고 있다.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나 오스왈드를 죽인 잭 루비 모두 친카스트로계 쿠바 이민자들과 깊은 관련을 가진 인물들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스페인 내전을 그린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부상으로 더 이상 퇴각할 수 없게 되자 동료들의 퇴각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파시스트들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다. 헤밍웨이가 자살하던 당시 지키고 싶은 동료는 누구였고 맞서야 할 파시스트는 누구였을까?
미국과 수교 이후 쿠바에는 체게바라의 가치와 헤밍웨이의 낭만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같다는 생각이 여행 내내 떠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