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목사의 서재>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는 통일이 곧 될 줄 알았다. 속내를 털어 놓자면 나는 통일지상주의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통일을 늘 생각하는 이유는 남쪽 사회의 빨갱이 포비아, 레드 컴플렉스가 싫어서다. 모든 합리적인 판단을 막아서는 빨갱이 공포가 존재하는 한 남한 사회의 성숙은 기대할 수 없다.
나를 향해 가해진 빨갱이라는 익명의 언어 폭력을 SNS에 하소연했더니 오랜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그런 오해 받지 않게 처신하라고 .” 이건 여성이 옷을 야하게 입어서 강간을 초래했다는 논리와 흡사하지 않은가? 빨갱이 공포증은 이와 같이 우리의 성정을 왜곡시킨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물러나고 전쟁 이후 세대가 원로 자리에 앉게 되면 그 막연한 증오도 사라질 것이라는 순진한 상상을 했었다. 누구의 잘못이든 눈앞에서 살육을 목격한 세대에게 용서하라고 충고하는 일은 가혹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적’에 의한 살육을 목격하지 않은, 오히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 ‘우리 편’에 의한 살육을 목격한 민주화 운동의 주역인 50대와 그 위 세대의 정치 지향성을 보면 말문이 막힐 정도다. 나에게 그 댓글을 남긴 친구도 멀쩡한 친구였는데 말이다.
도대체 그 증오와 공포의 근원은 어디일까?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면 ‘빨갱이’제목을 가진 책이 2권 나온다. (2권이 더 있지만 이미 품절되었다) . 그 중 학문적 차원의 ‘빨갱이’ 연구서는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심인사, 2009년) 뿐이다. 이 책에는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필자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빨갱이 공포증이 생겨난 것은 세칭 ‘여순반란사건’ 때부터다.
제주도 항쟁(4.3 사건) 진압을 명령받은 여수 14연대가 동족 학살을 할 수 없다며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1948년 10월 19일에 봉기한 사건이 ‘여순반란사건’이다. 여순사건의 발발에는 북한의 지령도 남로당의 명령도 없었다. 처음에는 하사관이 중심이 된 여순 사건은 지역주민들의 참여로 인해 들불처럼 퍼져 나간다. 역사에는 좌익에 의한 학살극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훨씬 더 많았다. 필자 김득중은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 성립 초기 국가 형성과정에서 노골적인 국가 폭력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주체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임무를 맡은 군대와 경찰이었다.”. 이러한 냉전적 역사 인식은 “파국의 유일한 원인으로 ‘폭력적 좌파 세력’을 제시하여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고 현재의 역사를 (탈)정치화하는 것이다.”
당시 친일 청산과 사회개혁이 더뎠던 것도 여순 사건에 시민들의 참여가 많은 이유가 되었다. 이들은 이념 지향적 인물들이 아니라 해방 공간에서 다가올 사회의 모습을 고민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하부터 시작된 여수 순천 지역의 독서 모임 회원들이 대부분 여순 사건에 함께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함으로써 국가폭력을 정당화하고 국민과 빨갱이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처럼 빨갱이는 인간도 아니고 죽여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해체되었지만 신분 해방의 체감은 일제하에서나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1923년 시작된 백정들의 형평사 운동도 이를 반증하는 사건 중 하나다. 따라서 1948년 이라면 신분제 철폐가 완전히 체감될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특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된 양반층은 배제적 계급이 없어진 상태가 불안했다. 천민출신들도 마찬가지로 짧은 역사를 가진 신분 해방이 혹시라도 취소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이들은 제사제도에 집착함으로써 문벌 행세를 하고 빨갱이를 새로운 ‘천민’으로 배제 시켰다.
필자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 조건을 심사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국민’이 되었다는 말이니 ‘국민’이라는 용어는 그 어감이 썩 유쾌하지 않다.
이 책에서 소개된 하구찌 유유이찌에는 여순사건을 최초로 연구한 일본학자다. 그는 여순사건이 국민당을 지원했던 미국과 싸운 중국의 인민 해방 전쟁,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운 베트남 전쟁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평가했다. 여순사건은 미국에 반대하는 봉기였고 거기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온갖 불만이 합쳐져 폭발한 사건이었다는 말이다. 여순사건 진압군에는 미군사고문단원 8명이 활동했다는 사실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이 사건을 처음부터 빨갱이로 몰고 갈 의도를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순 사건과 박정희
여순사건에서 박정희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사건 발발 다음 날 도착한 토벌군 정보국장 김점곤의 안내를 맡았었고 여순 사건이 끝난 11월 11일에야 체포되었다. 그의 남로당 경력이 문제였던 것이지 실질적으로 여순 사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체포된 뒤 남로당 군사 총책으로 가지고 있던 군내 좌익 명단을 토벌군에 넘겨 주었고 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고 여순사건 진압 당시 보여주었던 박정희의 ‘능력’을 높이 산 군지도부와 미군에 의해 구제되어 출감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좌익성향의 인물이 아니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익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열은 해방 후 주요 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등을 제시했고, 여운형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추구했다.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선호도가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사회주의 70%였다. 해방 후 어떤 국가 수립을 원하느냐는 동아일보 조사에서는 70%가 사회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박정희는 투철한 이념에 따라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이 아니라(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내가 박정희에게 가졌던 2%의 호감 중 1%가 사라졌다) 당시 그것이 대세로 보여 좌익에 줄을 섰을 뿐이다. 그러다가 여순 사건이 일어나자 반란군에 참여했을 법한 그는 천연덕스럽게 토벌군 편에 섰다가 남로당 경력이 발각되자 동지들의 명단을 넘기고 살아남아 결국에는 권력을 쟁취한다. 권력을 잡은 뒤에는 여순사건의 진압 책임자들이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하게끔 허용한다.
빨갱이는 대한민국 건국신화의 주요한 소재다. 빨갱이를 때려 잡아야 국가의 국민이 된다는 이 비극적인 건국 신화가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건국 논란,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재연되고 있다. 박정희 시절의 국사 국정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고난에 찬 민족의 역사이며 민족의 진로를 방해하는 내외의 모든 적은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투쟁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579쪽)
여순사건에서부터 시작된 빨갱이를 잡고 국민이 되자는 선동은 한국 전쟁기의 보도 연맹 학살, 또 세월이 흐른 뒤의 광주 학살로 이어진다. 이어서 용산참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 빨갱이를 붙이면 학살은 정당화 된다. 자식을 잃고 슬픔에 잠긴 세월호 유가족에게도 빨간 색칠을 하면 ‘자식 묵숨을 돈으로 환산하는’ 파렴치한 부모가 된다. 집권당의 국회의원 후보가 된 용산참사 책임자와 세월호 유가족을 비하한 자, 국정교과서 옹호자는 시민들의 의식 속에 여순사건의 만들어진 역사가 변함없이 공포로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빨갱이의 공포는 세칭 진보세력에도 작동해 선거철이 되면 빨갱이 아님을 증명하는데 연연하면서 우클릭하기에 여념이 없다. 처음부터 배제의 원리로 시작한 ‘빨갱이’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에서 진보세력의 정치 세력화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나마 진보 흉내를 내는 보수 야당의 집권도 어렵다.
장인의 전력 때문에 빨갱이로 몰렸던 노무현은 유세과정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그렇다면 내가 집사람을 버려야 한다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빨갱이 논쟁을 아내 사랑으로 바꿔 놓은 노무현의 연설이 그립다. “너 빨갱이지? “. “아니 나 빨갱이 아닌데”의 실체 없는 대화는 빨갱이를 블랙홀로 만들어 모든 것을 빨아 들인다. 진보세력 조차 이 블랙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프고 슬프다.(을지로)